★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
예배는 나 하나의 조건을 통해서 내 주위 형제 전체를 보완하는 데 기인할 때 아름다워진다. 
그렇지 못하고 내 개인의 조건에 치우친다면 그것은 실패한 예배다.
땅 위에 수많은 교인이 있지만 사랑의 가치관을 바르게 드러내는데 자신이 쓰임 받나, 받지 않나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내 주위의 조건들을 세밀히 살펴보고 ‘나의 조건을 통해 전체를 드러내는 일에 아름답게 쓰임 받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밤낮으로 구상해도 모자란다. ‘나 개인의 조건을 통해 우리 전체가 아름답게 부상된다면 그 어떠한 조건도 내가 마다하지 않으리라’ 이런 마음의 각오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일평생 예배를 드려도 사랑의 가치관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땅에 주어진 모든 만물은 단 하나도 사랑의 조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세상에 있는 모든 문명이기(文明利器)도 사랑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어느 것 하나도 제자리를 지키지 못한다. 
사람만이 그 조건에서 본인 스스로가 벗어난다. 그래서 없는 어려움을 자초한다. 이러한 사실을 주위 모든 만물에게 비치는 바람에 그들도 똑같은 어려움을 겪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이 저주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이 저주를 받게 만든 요인도 사람이다. 우리에게 주신 조건들을 사랑의 가치관을 통해 바르게 이루어 가는 것이 참 사람의 할 일이다.
그냥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부으시고 축복하심에 감사하나이다.” 이것은 개인의 할 일이다. 사랑의 조건에서 할 일이 아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의 조건을 내 주위 형제에게 끼치게 될 때 그 사실이 사랑으로 가는 것이다. 
그것을 자기에게 쌓고 자랑으로 삼는다면 오히려 형제를 넘어뜨리게 하는 요인이 된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는 것이다. 
무엇을 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내 주위 형제를 보호하고 내 주위 형제에게 감사와 기쁨을 끼쳐 창조주를 바라보게 하는데 나의 조건이 쓰임 받게 할까?” 
여기서부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지혜와 능력을 더하셔서 그의 조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어가는 전진기지로 삼으신다.
찬송도 개인적으로 해야 될 찬송이 있고, 공중 앞에서 사랑을 이루는 찬송으로 할 때가 있다. 
찬송가 460장의 경우 공중 찬송으로 할 때는 “내게 부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조건이 너무 감사해서, 이 사랑의 조건을 모든 형제에게 골고루 나누는 데 쓰임 받는 내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마음이 따르고 난 뒤 찬송을 부르면 아름답다. 
바울 사도가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8:13)
“하나님께서 내게 부으신 축복의 조건이 내 주위 형제를 지키고 보호하는 일에 쓰임 받는 일이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나는 일평생 받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자라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물건을 팔 때 딱지를 붙인다. “이건 믿을 수 있는 제품이다.” 하고 그 딱지를 보고 산다. 
우리 삶의 가치관도 “내 모습을 통해, 내 행동을 통해, 내 재능을 통해 내 주위 형제의 마음을 불러일으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에 쓰임 받는 모두가 되게 하소서” 하게 될 때 모든 사실이 아름다워진다. “과연 저 사람들은 앞에 붙은 딱지도 믿을 만하고, 저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니 저 사람들은 진짜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도 본받고 싶다. 저 사람들이 건재 하는 한 언제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다.” 이런 마음이 주어지게 만드는 것이 참 믿음의 사람의 할 일이다. 
“내가 주를 믿나이다. 내게 축복을 주소서” 이러려고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다. 그건 골방에서 혼자 해도 충분하다. 
형제들 모두가 모여 서로를 보완하고 서로를 지키는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서, 완성된 모습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일에 쓰임 받는 빛과 소금의 직분을 다하라고 세운 것이 성전이다. 참 성전의 가치관을 잃어버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나 하나의 조건을 통해 형제의 사랑이 손상되지 않게, 사랑의 조건이 누락 되지 않게, 아름다운 사랑을 보호하는 일에 쓰임 받는 내가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꼭 들어서 쓰신다. 우리가 참 사랑의 가치관을 잃어버리면 그 순간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뒤로 돌리신다. 
손해를 보는 일이라도 우리를 “빛이라 소금이라” 하신 말씀이 바르게 부상되기를 바라서 일단은 수긍하고 넘어갈 때가 있다. 알고 속는 것, 알고 당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사랑을 보완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할 때는 “누가 네 것을 달라 하는 자에게 주며 다시 달라지 말며” “다시 달라지 말라니 나는 손해를 보란 말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더 큰 축복으로 보상하신다. 
나 하나의 조건을 통해서 모두가 보호받고 모두가 부상되는 일로 이어진다면 참 아름답다. 
“나는 싫어. 내 조건을 부상시켜 주지 않으면 나는 싫어” 모두가 부상되면 다 부상되는 것이다. 
내가 공부하는 것, 내가 머리를 쓰는 것, 이 모두가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몸 담고 있는 곳을 부상시키고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 지식을 익히고 노력한다면 그 노력은 가치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 일에 꼭 간섭하신다. 
(요12:24) 세상의 이치와는 정반대의 말씀이지만, 사랑의 참 가치관을 일러주시는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는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나를 보고 기분이 나빠서 그런가?’ 하고 온갖 생각을 한다. 상대방의 조건을 간파하지도 못하면서 상대방의 조건을 다 아는 냥,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구나. 좋다. 나도 네게 얼굴을 찡그릴 테다.’ 이렇게 하기에 없는 어려움이 배가 된다. 더 나아가 자기만 아니라 그 일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무리를 지어 멀쩡한 사람을 망쳐놓는다. 
내가 본 가시적인 조건이나 느낀 조건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 거기서 시작하게 되면 내가 할 일은 돕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도우실 사랑의 조건을 앞세워야 될 텐데, 자기가 판단한 조건, 귀신이 좋아하는 조건을 먼저 앞세우니 멀쩡한 사람을 망치게 된다. 
만일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였더라면 “어디 아프니?” 하고 이렇게 묻고 그 아이를 보듬고 나아갔을 것이다. 
내 주위 형제의 조건을 내가 먼저 떠안고 보듬어 나갈 때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간섭하시고 사랑으로 키워 가신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사탄의 조건을 앞세우기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앞세우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형제를 미워하고 믿지 못하는 조건을 내세우는 것은 귀신을 앞세우는 것과 똑같다.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조건이 우리 앞을 가로막더라도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을 앞세우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내 주위 형제가 어떠한 조건으로 인해 얼굴을 찡그렸던지 “어디 아프니? 무슨 일이 있니?” 하고 사랑의 조건으로 감싸는 아름다운 말이 앞서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내면의 조건을 부상시키는 일이 있을 때는 항상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하고 우리 앞을 가로막는 일이 생기기에 그런 일로 인해 마음이 상하거나 우리의 일을 주춤하지 않아야 한다.
(2008.08.10.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