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나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마6:25~34)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많이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뭘까? 못 배우면 못 배운 만큼 보는 반경이 좁고 생각하는 반경이 좁아서 그의 영역이 좁을 뿐, 많이 배우면 많이 배운 만큼 그 반경이 넓기에 그만큼 일을 하지 않으면 배운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 배우면 배운 만큼 그 일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오히려 배운 것이 그의 일평생에 덫이 된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생을 사는 동안 배우면 배운 만큼, 가지면 가진 만큼 자기의 삶을 바르게 영위하지 못하면 차라리 배우지 않음만, 차라리 돈을 벌지 않음만 못하다. 없으면 없는 만큼 그 영역이 좁아지고, 배우지 못하면 배우지 못한 만큼 영역이 좁아질 뿐이지 손해 볼 일은 없다. 그러기에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내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감사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할 일이다.
배운 것을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사용하게 되면 덫이 된다. 나라를 위해 사용한다 해도 창조주를 바라보지 못할 때는 덫이 된다. 정몽주, 사육신이 못 배웠으면 죽었을까?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록펠러다. 록펠러를 두고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라고 하는데,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록펠러’가 맞는 말이다.
배우면 배운 만큼 배운 가치관을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신 창조주께 그 사실을 돌리지 않고 자기 육에 그 사실을 담을 때는 일평생 덫이 되어 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신 연유대로, 땅 위에 사는 날 동안 배움의 기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그 사랑을 드러내는 일에 쓰임 받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기회를 허락하시고 그를 통해 역사하신다.
한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 없는 괴로움, 내일 있을 괴로움을 끌어당기지 말자. 많이 배우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알면 그만큼 괴로움을 끌어당겨 일평생 걱정하다 간다. 그럴 바에는 못 배운 만큼, 모른 만큼 그 영역 안에서 하게 되면 편히 지낼 수 있는데, 없는 머리를 짜내는 바람에 없는 괴로움을 만든다. 많이 배운 만큼, 많이 가진 만큼 넓어진 영역을 감당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넓어진 영역을 감당하지 못하면 없는 어려움과 덫을 스스로가 목에 거는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한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는 말 속에는 “네가 창조주를 기억하고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면”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 속에는 “너희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면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다. “너희가 내 말을 믿고 서로 사랑한다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신다.”는 말이다. “너희가 나를 믿고 믿음 가운데서 서로 사랑한다면” 이 말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할 일은 나에게 생명을 허락하시고, 구역을 허락하시고,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 위해 우리의 삶을 일깨워 가심을 믿고 감사함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따라 사랑하게 되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모든 매사, 어려움, 답답함, 괴로움도 결국은 우리를 이끄시기 위한 사랑의 방편이다. 곁눈질을 하고 허튼 곳을 바라보는 아이를 부모가 데리고 갈 때 아이는 괴롭다. 하지만 사랑하기에 끌고 가는 것이다. 그래서 ‘범사를 인정하라’고 하셨다.
세상의 조건들은 모든 것이 잘 풀릴 것 같아도 자기 욕심에 치우칠 때는 막상 다가가 일을 시작하면 모든 일이 막혀버린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아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일도 막상 그 앞에 서면 그 일이 물러간다. 여호수아의 말을 따라 제사장들이 요단강 물에 발을 디뎠더니 요단강이 갈라져 그들의 삶을 감사로 이끄셨다.(수3:8)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의 발걸음과 믿지 않는 사람의 발걸음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믿음의 사람은 어느 곳에 가든지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까?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줄까?” 그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언제나 지혜와 능력을 더하신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세상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실 때 나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지혜를 갈구하고 그 일을 사모하게 될 때 우리를 사용하시고 능력으로 이끌어 가신다.
(2008.09.14.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