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예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사51:13)
★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마18:10)
우리는 사람의 형상을 띄고 살아가면서도 우리의 존재가치를 모를 때가 너무나 많다. 
우리에게 참사람의 가치관을 알게 하시고자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까지 우리에게 사랑을 보이셨지만, 
우리는 항상 우리의 조건에서 삶을 시작하고 세상을 돌아보기에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사랑의 손길을 기억하지 못한다. 
사람이 정상적으로 자기의 삶을 살아간다면 어느 만물도 사람을 앞서갈 수 있는 조건이 없다. 
하지만 사람의 형상을 띠고서 사람의 가치관을 잃어버릴 때 그 어느 창조물보다 낙후됨을 알게 된다. 
이런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시고자 우리를 불러 모으셨다. 
참사람의 가치관을 바로 깨닫게 되면 그 어떠한 조건이 우리 앞을 다가오고 스쳐 가도 그 일로 인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부부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주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문으로, 사랑을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관문으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길 자체가 거기에 머물러 더 이상 나아가지를 못한다. 
거기에 머물러서 창조주를 바라보는 눈길 자체가 흐려지기에 두려움과 답답함, 괴로움과 어려움이라는 사실이 우리 앞에 다가온다. 
끝내는 죽음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종지부를 찍는다. 
이런 사실을 수천, 수만 대를 거쳐오면서도 사람이 자각하지 못할 때 끝내는 노아 홍수를 통해 쓸어버리기도 하고 전쟁이나 병마, 사고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종지부를 찍는다. 우리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누누이 깨닫게 해줘도 사람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허락하시고 믿음이라는 사실을 우리 앞에 이끌어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게 만드셨다. 그래도 그 사실을 돌아보지 않는다. 
한 순간적인 사실에 눈길이 머물고 생을 머물게 만들어서 모든 사실이 거기서 멈춰서 그 사실이 다인 양 자기의 삶을 머물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
이런 사실을 주위 형제들을 통해 뻔히 보면서도 자각하지 못한다. 왜 자각하지 못하느냐? 
깨닫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사51:13) 왜 학대자가 생길까? 창조주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자, 찾게 하시고자 학대자를 세운 것이다. 
우리에게 어려움, 괴로움, 답답함이 닥친 것은 창조주를 바라보게 하시고자 함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내신 그 뜻을 내가 따르기 싫어서, 따르게 하시고자 어려움을 주시니 안 할 수가 없다. 
어려움에서 빠져나오려고 아등바등하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을 찾으라고 주신 말씀이다.
“네가 깨닫지 못하는 바람에 너를 깨닫게 하시고자, 창조주를 바라보게 하시고자 네 앞에 세운 조건이다.” 
다시 말하면 “이래도 네가 못 깨닫느냐?” 하시는 것이다. 
내 영혼의 삶을 허락하시고자, 참사람의 가치관을 찾아주시고자 예비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완전하지 못하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뻔히 안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일생을 살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창조주를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창조주를 기억하기 위해서, 완전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의 생명과 삶을 한정 지우신 것은, 우리의 생활을 한정 지우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생명에 한정을 지운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주를 바라보지 않을까 싶어서, 창조주를 바라보지 못하기에 바라보게 하시고자 우리의 생명을 한정 지운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면 내 앞에 어떠한 일이 주어져도 나를 깨닫게 하시고자 주신 조건이기에 내가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길을 바로 찾을 때 모든 사실이 물러간다. 
우리가 참사랑의 가치관에 마음을 담고 발을 내딛게 될 때 모든 사실이 한순간에 정리되고 물러간다. 
깨닫고 나면 오히려 죽음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마18:10)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사랑의 표현이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18:6)는 말씀도 있다.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죽음을 초래한다는 말이다. 
우리를 향한 사랑의 배려에, “사랑하라”는 사랑의 배려에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억압적으로 하신 것 같지만 사실은 참다 참다 못해서 강팍한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시고자 사랑의 배려로 주신 말씀이기에 믿고 따르면 모든 사실이 아름다워진다. 
모세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방해했던 바로 왕도 창조하셨다. 왜 그를 창조하셨나?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시고자,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시고자 바로를 창조하셨다. 
후대인 우리는 “바로는 지옥에 간다.”고 쉽게 얘기할지 모르지만, 바로는 후대인 우리를 위한 예표의 사람이다. 
함부로 판단하기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배려에 맡길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하게 될 때 우리를 위해 창조하신 창조 자체가 근본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일에 우리를 사용하신다. 
사는 날 동안 돈을 벌더라도 이런 일에 쓰임 받게 돈을 벌고, 일을 해도 이런 일에 쓰임 받게 일을 하고, 사랑을 해도 이런 일에 쓰임 받게 사랑을 해야 한다. 
어느 때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실 때 내 삶을 일깨울 수 있는 깨어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깨어 있는 사랑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내 앞에 주어진 불합리한 일,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일,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을 걱정하지 말자. 두려워하면 두려워한 만큼 그 일이 더 확대된다.
왜냐하면 그 사실은 나를 일깨우시고 나를 끄집어내시고자 배려하신 사랑의 배려이기에 먼저 나의 발걸음을 옮겨가는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이 되자. 
누구를 탓하기보다 내가 바로 깨달아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그 일에 발걸음을 떼면 내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던 일이 자연히 물러간다. 
우리가 불길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한다면, 내가 끌 수 없다면 그 불길을 맡기고 빨리 물러나는 것이 지혜롭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정리하신다. 이 사실을 조금만 깨달아도 그 어떠한 일이 우리 앞을 스쳐 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2008.10.26.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