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사실을 벌여놓은 뒤 자신의 상황이 서원했을 때와 달라지면 어느새 그 일을 잊어버리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 
자기의 입술로 그런 말을 뱉어낸 순간부터 하나님께서는 그의 발걸음을 옮겨서 자기가 입술로 뱉어낸 그 사실을 이끌어 내시고자 하신다. 
하지만 서원한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입장에서는 그 일이 의외의 일로 대두가 된다. 
그래서 “나는 팔자가 왜 이러나?” 하고 자신을 한탄하기도 하고 주위를 원망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이 다가왔을 때 그 일을 지혜롭게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거나 자기를 위해 주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귀와 지혜가 열려야 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없이 자기 뜻대로 그 일을 정리하려는 바람에 더욱 수렁으로 빠진다. 
(민32:23) 어려움을 통해서 네 입술로 서원한 그 일을 하나님께서 끄집어내신다. 
일이 풀리게 하려면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게 자신을 드리게 되면 내가 일을 풀려고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기 위해 내 일을 풀어주신다.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일에 바르게 쓰임 받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사실을 책임지시고 이끌어 가신다. 
(전5:1~7) 이 말씀에 걸려들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도 걸려든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고 자기 입술로 뱉어내고 난 뒤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 덫에 걸리고도 스스로가 그 일을 훼파해 버리고 그 원망을 주위에 돌린다. 
그래서 어려움을 자초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입술로 뱉어낸 그 길로 자기가 걸어가면서 하는 말이 “내가 끌려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만일 신이 계신다면 나를 도와주세요. 내게 이런 일이 주어지면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창설하시고 우리를 위해 모든 조건을 허락하셨기에 비록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아도 우주를 창설하신 분을 찾게 되면 하나님께 서원하는 것과 똑같다. 
만물을 창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가 믿든, 믿지 않던 그에게 생명을 허락하셨기에 어려움에 처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입술로 아뢰게 된다. 
그 일이 이루어지고 나면  언제 내가 그 말을 했나 하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자기 본래 자세로 돌아가 어려움을 자초한다.
‘죄가 너를 끄집어낸다. 네가 입술로 뱉어낸 그 일이 너를 끄집어낸다. 족집게같이 꼭 끄집어낸다.’ 
이왕 살아갈 바에는 집혀서 끌려 나오지 말고 내 발로 걸어서 나가자. 
자기 생각대로 머리를 굴려서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내 삶을 드리고자 하는 기본적인 발상에서 시작하게 되면 지혜와 능력을 주신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말하든, 믿지 않고 말하든 그 입술로 우주를 창설하신 하나님을 찾게 되면, 아니면 “나를 도우시는 무슨 신이 있다면” 이런 말이라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찾아가신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신다. 
절에 앉아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불상 앞에서 빌며 그 입으로 뱉어낸 그 말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그의 삶을 간섭하신다. 자기는 부처 앞에서 빌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그의 삶을 지켜보시는 것은 하나님이다. 
왜냐? 그에게 생명을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된다면, 내가 일이 풀린다면 이렇게 살겠나이다.” 부처 앞에서 약속해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 약속을 받으신다. 단지 호칭을 달리했을 뿐이다. 
이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간섭하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자. 
절에 있는 스님들도 하나님께서 생명을 허락하셨다.
그들을 우리가 힐난하기보다는 그들이 돌아올 수 있게 사랑으로 보듬고 감싸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우리가 사랑을 보여주지 못했을 뿐이지 그들도 나름대로 사랑을 찾고자, 참 길을 찾고자 안간힘을 쓴 사람들이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고 보듬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2008.11.09.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