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회소식
아회찬양선교재단의 다양한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5:17~18)
 
 
어느 때나 새 하늘과 새 땅을 추구하고 어느 때나 새 하늘과 새 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의 마음 자세를 갖추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할 일이다. 
장례식에 가는 사람은 장례식에 걸맞은 옷차림과 행동을 하고 결혼식에 가는 사람은 결혼식에 걸맞은 옷차림과 행동을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마음으로 추구한다면 이러한 삶이 주어지게 먼저 실제 생활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게 삶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내 개인의 감정이나 조건에 치우쳐서 함부로 주위 일들을 판단하고 판단한 사실을 입술로 뱉어내거나 삶을 통해 그 일을 어지럽힌다면 우리를 위해 허락하신 그 조건을 스스로가 훼파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를 위해 허락하신 모든 조건이라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은 그 사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 자세와 생활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실제 생활에 담게 될 때 우리의 삶이 자라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바램이 있다. 바램이 있다면 먼저 그 바램이 나의 실제 생활에서 나타날 수 있게 삶을 살아야 한다.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비가 오기 전에 비가 왔을 때의 일을 대처할 수 있게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실제 생활에 들어가면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막연하게 마음으로 주어질 일만 구상하지, 그 일이 도달했을 때 대처할 준비는 하지 않는다. 
바램이 있다면 바램이 이루어지기에 앞서서 그 바램이 도달했을 때 바르게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도달한 뒤에 부랴부랴 준비한다면 그 무엇보다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우리가 원망이나 불평을 하는 것은 내게 주어져야 할 좋은 조건이 내게 주어지지 않고 내 주위 사람에게 주어지게 될 때 그만 마음이 상해버린다. 
자기에게 좋은 조건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바람이라면 자기에게 그 조건이 주어지기에 앞서서 그 일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줘야 한다. 
 
아합 당시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기도할 때 사환을 시켜 비가 온다는 소식을 왕에게 전했다. 
비가 온 것이 아니라 비가 올 징조(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만 보였을 뿐이다.(왕상18:44) 
비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내게 좋은 조건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좋은 조건이 내게 도달했을 때 그 사실을 누릴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야 그 사실이 내게 아름다워진다. 
내게 좋은 조건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먼저 그 사실이 내게 도달한 줄 알고 그에 준한 삶을 사는 것이 우선이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하시는 데도, 
우리는 그 사실을 내 눈과 내 조건으로 확인할 때까지 그 일을 지켜볼 뿐 그 일에 대해 준비하지 않는다. 
막상 그 사실이 내게 도달했을 때는 나와 상관없는 냥 그 일이 지나가버린다. 지나가고 난 뒤 원망, 불평을 한다. 
 
우리를 사랑하심을 보여주시고자 어느 순간에나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다가오심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마음으로 바라는 사람이라면 그 사실이 내게 도달할 것을 먼저 믿고 자기 삶을 살면 될 것을, 사람은 항상 도달할 때까지 때를 기다린다. 
그 사실이 내게 도달한 줄 알고 믿음의 삶에서 시작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자.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무 준비도 없는 조건에서 축사를 하셨다. 다시 말하면 감사의 기도를 하신 것이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 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11:41) 하셨다. 
그런 후에 “나사로야 나오라”(요11:43)고 하신 것이다.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있을 때도 풍랑이 일어 제자들이 아우성을 칠 때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8:26) 하신 후에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셨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바램이 있다면 그 바램은 항상 우리 주위를 맴돈다. 
우리의 심중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바램을 먼저 아시기에 우리가 기도하기에 앞서서 그 바램이 우리의 주위에서 맴돌게 만드신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에 자식이 어떠한 요구를 하지 않아도 자식이 요구할 것을 먼저 알고 준비한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자식이 배가 고플 것을 먼저 알고 사전에 먹거리를 준비해놓고 기다린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내적인 조건을 먼저 아시기에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우리가 입술 떼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예비시키신 그 조건과 우리를 잇는 통로이다. 기도는 없는 것을 있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사실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바라기에 앞서서 우리의 바램을 먼저 아시고 항상 준비된 가운데서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가 입술만 열면 통로를 통해서 바로 우리에게 도달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자. 
 
부모의 조건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그릴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심에 감사하는 데부터 시작하는 우리가 되자. 
내 자식이 성공했다고 해서 그게 대단한 줄 알고 거기서 만족하고 머문다면 오히려 저주가 된다. 
사는 날 동안 내 자식이 잘 되는 것은 참 좋다. 하지만 내 자식이 잘 되는 것에만 머문다면 잘 되지 않음만 못하다. 
우리에게 부모라는 너울을 씌운 것은 자녀를 통해 창조주의 사랑을 그리는 위치에 세워 놓은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자식이 잘 되는 거기서 멈춰버린다. 
 
가정의 불화와 어려움은 창조주를 향한 감사가 멈추는 데부터 시작된다. 
내 자식이 잘 되는 것, 우리 가정이 잘 되는 것, 여기서부터 시작하기에 가정이 어려워진다. 가슴 칠 일을 스스로가 만들어낸다. 
우리를 부모의 위치와 자녀의 위치에 세운 것은 창조주를 바라보게 하기 위해 세우신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것은 그 사실을 통해 창조주를 기억하는 데부터 시작하게 하신 것이다. 
 
이러한 바램이 바르게 이루어지게 하려면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참 삶의 가치관을 바로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위치를 바로 찾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연유대로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는 세상을 이루어내시기 위해 나를 사용하신다. 
그러기에 바램이 있다면, 그 바램이 사랑으로 연결된 바램,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바램이라면 어떠한 바램이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사랑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에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말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삶을 통해 영광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삶에 우리의 삶을 이끌고 가는 믿음의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이 되자. 
참 삶이 가치관이 우리 앞을 끌고 나갈 때 우리가 믿고 감사함으로 따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평생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역사하실 것이다.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이 덮쳤을 때 예수님은 주무시고 제자들은 아우성을 쳤다. 누구나 그러한 사실이 주어지면 아우성을 친다. 
하지만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그 조건 가운데는 예수님의 삶을 통해 땅 위에 생존하는 전후의 모든 세대와 모든 사실을 새롭게 하시고자 하심이다. 
그러기에 한낱 풍랑에 의해 삶이 좌절되거나 소멸되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자들을 행해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8:26) 하고 말씀하실 때에 조용하게 말했을까? 큰 소리로 말했을까? 
풍랑 속에서 자기들의 생각 속에 빠져서, 자기들의 눈으로 보는 것에 치우쳐서 조용하게 말씀하셨으면 제자들에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큰 소리로 호령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정신을 차린 후에야 바다를 잔잔케 하셨다. 
 
사는 날 동안 믿음의 사실에서 흔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그냥 내동댕이치시려고 우리에게 어려움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 위한 사랑의 방편으로 주신 조건임을 알아, 어려움이 주어질 때 오히려 감사하는 데부터 시작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일터에서나 어디서나 리더자가 큰 소리를 칠 때는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기 위해 큰 소리를 친다. 
각자의 생각과 조건에 치우쳐서 바라봐야 할 곳을 바라보지 못할까봐 큰 소리를 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려움은 우리가 바라봐야 할 곳을 바라보지 못할 때 벌어진다. 
어려움이 닥칠 때는 오히려 감사하는 데부터 시작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나를 사랑하셔서 주신 어려움과 시련에 감사드리나이다”에서부터 시작하는 믿음의 사람의 참 모습이 되자. 
 
(고후5:17~18)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사랑의 조건을 바르게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새로이 지음 받는다는 말이다. 
참 사랑의 삶에 도입한 사람이라면 언제나 새롭게 우리를 이끄신다. 
문제는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삶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으로 새로이 지음 받게 되면 모든 사실이 새로이 지음 받게 된다. 
 
문제는 우리가 진정으로 내 주위 형제들을 사랑하지 못한 데서 시작하기에 모든 사실이 멈추어 버린다. 
갇혀버리고 닫혀 버린다. 모든 사실이 소멸되어 버린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사랑이 소생하면 우리의 모든 사실이 다 소생한다. 
하지만 우리 속에 사랑이 소멸되면 모든 사실이 다 소멸되어 버린다.
 
참 사랑의 꽃을 피울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괴로울 때, 답답할 때, 어느 때라도 마음에 위안을 얻을 수 있고 감사와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지켜보는 모든 사람에게 참 가치관을 보여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사는 날 동안 무수한 일들이 우리 앞을 스쳐가고 무수한 바램들이 우리 앞에 머문다. 
이러한 바램이 머물 때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예비한 사랑을 기억하는 우리가 되게 먼저 사랑으로 하나가 되자. 
사랑으로 연합하게 될 때 언제나 나에게 구하라 하셨던 말씀을 기억할 수 있는 우리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고 필요한 모든 조건을 언제나 준비하고 계심을 기억하자. 
우리가 요구하는 그 순간부터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그 순간부터 예비하심을 기억하는 믿음의 삶이 되자. 
우리가 참 사랑의 모습으로 입술을 열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을 합치게 될 때 언제나 우리에게 이러한 조건을 허락하시게 예비하신 그 사랑을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되자.
 
(2007.09.30.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