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회소식
아회찬양선교재단의 다양한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하신대로 우리가 호렙산에서 발행하여 너희의 본바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아모리 족속의 산지 길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른 때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모리 족속의 산지에 너희가 이르렀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회보케 하자 하기에” (신1:19~22)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수고한 대가를 바란다. 
가정을 돌보고 가사를 담당하는 아내라면 가정을 통해서 자기가 수고한 대가를 바라게 된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도 자기가 사랑을 쏟고 마음을 들일 때 그 자식을 통해서 바랄 것이다. 
각자의 능력과 소신대로 주어진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수고한 대가만큼의 수당을 받을 때 그 마음에 감사가 된다.
 
이러한 마음과 조건도 우리에게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범사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러한 조건을 통해 그 일의 근원을 돌아보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의 생각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에서 그쳐 버린다.
 
하나님께서 범사를 통해 조건을 허락하시고 그러한 조건을 우리 앞에 벌이실 때는 그 조건을 통해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램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 꿈을 허락하시고, 형제를 허락하시고, 사랑할 수 있는 연인을 허락하시고 그 가운데 가정을 맺게 하시고 자녀를 얻게 하셨음에도 이 모든 일을 그냥 우리에게 주어지는 범사로서만 그쳐 버리는 것이 우리의 행사이다.
 
이러한 조건들을 통해 그 범사를 일으키신 창조주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허락하신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우리는 그러한 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생각에 그쳐 버리고, 불평불만으로, 시기 질투로, 짜증으로 대응하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셔서 모세라는 사람을 통해, 광야 생활을 통해, 무수한 일들을 통해 사람의 상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조건들을 허락하셨다.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조건으로 허락했더라면 자기들이 당연히 받아야 하고, 당연히 받을 수 있는 조건의 사람들이라고 단정 지을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당연한 일에 감사할 수 있는 조건만 되었어도 그들을 광야 생활로 이끌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감사치 못할 것을 먼저 아시고, 배신할 것을 먼저 아셨기에 끝내 그들을 광야 생활로 이끄셨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막막하다, 너무나 답답하다’ 할 때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나의 심성이 워낙 강퍅함을 아시기에 나의 생활을 이같이 이끄셨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 지혜롭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퍅하고 그들의 생활이 약은 데 치우치는 바람에 어떠한 조건이 주어져도 감사치 못할 것을 하나님께서 먼저 아시고, 끝내 사람의 방법으로는 취할 수 없는 조건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셨던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을 조금 쉽게 살고 싶거든, 조금 재미있게 살고 싶거든, 조금 부드럽게 살고 싶거든 어떠한 조건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지혜롭다.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 치우쳐 머물러 있을 때 그냥 머물러 있는 것으로서 그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머물러 있는 날수를 그대로 다 헤아리신다. 
우리가 믿지 못하고 감사치 못하고 머물러 있는 날수가 짧은 것이 아름답다. 
길면 긴 만큼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는 날수가 길어진다. 
길면 긴 만큼 우리가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고통이 길어진다.
 
이러한 사실을 조금이라도 알고 감지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램을 따라 우리의 삶을 한시라도 빨리 앞당기는 것이 지혜롭다.
‘나는 왜 이럴까? 내게 왜 이러한 조건이 주어질까?’ 하기에 앞서서 자기에게 주어진 그 범사를 통해 자기의 삶을 앞당기는 것이 지혜롭다. 
‘나는 왜 매일 이런 일만 주어질까? 나는 왜 재수 없는 일만 닥칠까?’ 이러기에 앞서서 이러한 일이 자기에게 닥치지 않게 자기의 삶을 앞당기는 것이 지혜롭다.
 
사람이 짜증이 난다고 해서 불평불만하고, 짜증이 난다고 해서 성질내면 성질낸 만큼 그 일은 더 어려워진다. 
자기에게 주어진 악조건을 통해 그 역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그 자리에서 머물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데도, 우리는 그러한 일에서 빠져나오기는커녕 내게 주어진 범사를 내게서 그쳐 버리고 그 일의 근원을 돌아보지 않는다. 
그래서 끝내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수렁에서 지혜롭게 빠져나오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항상 우리 앞에 제시하시고 하루 속히 거기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라신다. 
우리 스스로가 그 안에서 불평불만하고, 짜증 내고, 성질내고, 열 받아서 뛸 뿐이지, 거기서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입을 떼는 사람들이 없더라는 말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예33“3) 이렇게 말씀하시고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 이렇게 말씀하셔도 누구 하나 그 일을 고려하지 않더라는 말이다. 
하루속히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이 되게 불평불만 하기보다도, 짜증 내기보다도 그 일을 도래시킨 그 분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임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거기에 머문다.
 
지난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같이 행동했기에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서 광야 생활을 하게 하셨다. 
광야 생활을 통해 반석에서 물을 허락하시고, 메추라기를 통해 고기를 허락하시고, 만나를 통해 그들의 양식이 되게 하셔서 그들의 삶을 이끌어 오셨다.
 
이 같은 사실을 자기들의 입으로 먹어보고, 이 같은 사실을 자기들의 입으로 마셔보기도 하고, 자기들의 눈으로 확인해도 이러한 사실을 믿지 않았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조건에서도 이같이 광분했는데, 사람이 할 수 있는 조건으로 허락하셨더라면 더욱더 광분했을 것이다.
 
사람이 일생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범사를 통해 주어지는 사건과 조건들은 우리의 삶을 이끄시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그러기에 내게 주어진 어려움과 괴로움, 답답함에 연연하기보다는 나를 일깨우시기 위해 예비하신 일임을 알고 감사로서 화답하는 우리가 되는 것이 지혜롭다. 
불평 불만하기보다, 성질내기보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입을 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영광 받으시고자 좋은 범사를 통해 감사할 수 있는 일들을 속속히 만들어 가실 것이다.
 
세계사를 통해 보게 되면 동양이든 서양이든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께서 사랑을 깨달아갈 수 있는 조건들을 누누이 허락하셨다.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기 눈으로 보이는 일들에만 치우칠 뿐 그 밑에 깔려 있는 사상은 돌아보지 않더라는 말이다.
‘공자의 중용사상’이라고 말하는데 성경에서는 수천 년 전부터 이 말씀이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사람을 통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를 바라심’을 말씀을 통해 전해주셨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을 돌아보지 않고 모든 일을 우리의 생각과 판단으로 결정지어 버린다. 
그러기에 우리의 갈 길이 자꾸 모호해지고 어려워지고 풀리지 않는다. 
어려움이 닥치면 어려움을 통해 우리가 해야 될 일을 돌아보지 않고 그 어려움을 불평불만으로 머무르고, 성질내느라 머무르고, 짜증 내느라고 머무르고 끝내는 자기의 삶을 스스로가 자멸하게 만든다.
 
성경에서 “너희가 가데스에 여러 날 동안 거하였었나니 곧 너희가 그곳에 거하던 날 수대로니라”(신1:46)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나안을 허락하셨지만, 그들이 믿지 못해 들어가지 못하고, 주저하고 생각하며 나름대로 이리 재고, 저리 재고 했던 그 날수대로 그들이 어려움을 겪었다는 말이다.
 
아이들을 키워보면 그렇다.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자꾸만 위로 기어 올라간다. 
올라가서 못 내려오는 상황에서 밑에서 엄마 아빠가 뛰어내리라고 해도 못 뛰어내린다. 
엄마 아빠를 믿고 뛰어내렸더라면 별것 아닌데 결국은 엄마 아빠를 못 믿은 시간대로, 못 믿은 조건대로 겁을 내게 된다. 
다른 예로, 엄마가 아이의 손을 잡고 세상을 알게 하고자 글자를 가르쳐간다. 
엄마의 말대로 꼬박꼬박 따라 하면 다행이지만, 자기의 고집대로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아등바등한다면 그 시간만큼 아이는 세상 지식을 알아가는 것이 늦어진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못 믿어서 ‘가데스 바네아’라는 곳에서 머무른 날수대로 그들이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이제는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내 소견대로, 내가 아는 지식대로 할 것이 아니라 범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바램을 따라 삶을 살아드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신1:19~22) 이스라엘 사람들의 행적이나 오늘날 우리의 행적이 조금도 다를 바 없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자기들 소견대로, 자기의 아는 바대로 그 일을 간파해서 정리하는 바람에 끝내는 믿지 못하고 ‘가데스’라는 곳에 머물러서 주저하고, 지체하고, 불평불만하고 성낸 그 날수대로 괴로움을 겪었던 사실을 보게 된다.
 
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생활과 똑같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조건을 감사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 우리의 입술은 원망과 불평으로, 짜증으로, 성냄으로 대처하게 된다. 
내게 주어진 자리가 얼마이든지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맡기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몸을 두고 있는 곳은 좁을지라도 내가 해야 될 일은 온 세상 곳곳을 향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내게 주어진 작은 구역, 내게 주어진 작은 터, 내게 주어진 작은 집채에 치우치지 말고 내게 주어진 구역을 통해 맡겨진 이 세상을 하나님의 기뻐하심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이러한 사실을 꼭 기억해서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뤄드리는 산증인이 되자.
 
‘현재 내 조건에는 그러한 일을, 세상일을 돌볼만한 여유가 없는데, 현재 내 형편에서는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볼 겨를이 없는데’ 이렇게 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 일을 하게 될 때 우리의 모든 삶을 지켜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신1:21)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는 말은 네게 주어진 그 조건을 통해서 네가 할 일을 지체하지 말라, 네가 할 일을 멈추지 말라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꼭 기억해서 우리의 사는 날 동안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램을 이뤄드리는 산증인이 되자. 
이 같은 삶을 살아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미쁘게 보시고, 지혜와 능력을 더하셔서 맡기신 구역을 감사로, 기쁨으로 수놓아 가게 하실 것이다.
 
※ 누구를 들어서 그를 통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갈 때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램은 그의 삶을 통해서 무리를 이끌어가실 뿐이지, 그가 잘나서 그 일을 맡기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잘못 인식해버리면 그 사람을 드러내기 위해, 그 사람을 들어올리기 위해, 그 사람이 잘나서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그 사실이 자기에게서 머물 때 그의 삶은 한순간에 몰락하고 만다. 
성경에 자기의 삶이 몰락한 사람들이 이와 같이 자기 삶에 치우친 사람들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속지 않는 우리가 되게 마음을 써야 한다.
 
(2000.10.01. 주일 / 김영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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