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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4.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 등록일 : 2025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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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중략...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막11:12~14)

★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중략...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11:20~24 )

★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중략...’ (요11:21~27)

★ ‘...중략...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중략...’ (요11:38~42)


사람의 바램은 모두가 한결같다. 자기만의 바램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바램이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보잘 것 없는 조건으로서 자기의 생을 마무리 짓는다. 

잘 사는 사람은 잘 살고 못 사는 사람은 못 살고, 이런 사태가 왜 벌어질까? 믿는 사람의 신앙관을 떠나서 인간적인 존재로서만 이 사실을 생각해보자. 잘 살기를 바라면 잘 살고자 하는 바램의 종착점은 어디일까? 

문제는, 잘 살기를 바라면 잘 사는 사람의 모습이 자기의 생활에서 떠올려져야 하는데 잘 살기를 바라면서 자기의 생활에서는 걸인 행색을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평생을 수고하고 일해도 잘 사는 모습을 스스로가 찾지 못한다. 멋있게 살고 싶다는 바램을 가진 사람이라면 멋있게 사는 사람의 모습이 자기의 생활에서 드러나야 한다. 

멋있게 사는 사람이 첫째 갖추어야 될 조건이 뭘까? 멋있게 사는 사람은 자기 삶에 대해 추구하는 바를 똑똑하게 말한다. 
멋있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한평생 그에 대한 말을 하지 못한다. 

걸인은 한평생 걸인의 소리를 한다. 공부해서 검판사가 되어도 소용없다. 
그 사람의 바램 자체가 한정되어 있기에 결국은 추락한다. 거지가 부자가 되었기에 그것을 지속하지 못해서 망하는 것이다. 

성공하고 싶으면 성공한 사람의 행색을, 부자가 되고 싶으면 부자의 행색을 눈 뜬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해줘야 한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한 사람의 행색, 아픈 사람은 눈을 떠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픈 사람의 행색을 한다. 
“오늘 또 아프지 않겠나?” 분명히 아프다. 자기가 추구하고 바라는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여기서 신앙관을 싹 빼버리고, 사람들은 ‘마인드 컨트롤’에 빠져 자기 의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은 항상 진폭이 있는 생활을 한다. 이런 불안정한 요소가 항상 따르기 때문에 자신을 가누는 데 한도가 있고, 한정이 되어 있다. 
한순간은 마인드 컨트롤로 자신을 부상시키고 일깨울 수 있지만, 그 사실을 그대로 일상생활에서 일률적으로 이끌어가기는 어렵다.

다윗은 시편에서 ‘반석 되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어떠한 조건에도 흔들리지 않는 창조주 하나님께 근원을 두고 있기에, 내 삶과 조건이 아무리 불안정해도 그 사실을 믿고 그 사실에 부합된 생활을 해나갈 때 모든 사실이 안정된 사실로 간다” 여기에서 시작하기에 그 삶이 감사로 이어져야 정석이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가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하는 바람에 스스로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은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했기에, 그러한 삶을 통해 자기의 모든 삶을 바꾸었기에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하는 것이다. 
믿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믿는 사람의 행각을 하고, 그 행각 자체가 우리 눈에 보여야 한다. 

(막11:12~14) 때가 아니기에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못 맺는 것이 당연한 데도 이 말씀을 하신 것은  “항상 준비된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믿음의 삶의 모든 조건을 항상 갖추어 놓아야 한다. 

물질이 있어야 부자 행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있든 없든, 과연 내가 믿고 간구하는 사람이고 그 일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부자의 조건에서 시작해야 한다. 
성공한 사람이라면 성공한 사람의 조건과 행각에서 모든 사실이 이어져야 성공의 삶이 주어진다. 

무화과나무는 때가 아니라 열매를 못 내었지만 우리의 삶은 어느 때나 추구하면 추구한대로 열매를 낼 수 있다. 
믿음의 사람의 조건에서는 어떠한 조건이든 추구하면 추구한 사실을 어느 때나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어느 때든지 내 삶을 스스로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믿음의 사람, 능력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미처 준비를 못했는데, 내가 지금 기분이 나쁜데, 내가 지금 상황이 안 좋은데”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어떤 사실을 요구할 때는 어느 때든지 제시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나사로의 조건을 통해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몇 번이나 당부하셨는데 끝까지 믿지 않았다. 
“예. 믿나이다” 하고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고 대답했다. 
예수님께서는 현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입술을 떼신 후 나사로가 살아 걸어 나올 때까지 바라시는 바램과 조건을 한 번도 흔들지 않으셨다. 

‘내가 어떠한 삶을 살겠다’고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지금 기분이 안 좋다. 내가 상황이 안 된다”고 내가 추구하는 그 사실을 변동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오늘 하려고 했는데 누구 때문에 속상해서, 무슨 일이 있어서” 진정으로 사랑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내게 어떠한 조건이 있더라도 핑계대지 않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자. 

믿는 사람이라면 믿는 사람의 행각을 우리의 실제 삶에 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꼭 필요해서 보내셨다” 그 사실을 믿고 나아갈 때 나의 할 일은 어디든 준비되어 있고, 내게 주어진 모든 사실은 내가 쓰임 받고자 하는 대로 모든 사실이 아름답게 이어진다.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들을 스스로가 불러 일으켜서 없는 일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 아름답지 못한 일을 추구하게 되면 가장 먼저 자기 마음이 굳는다. 
마음이 굳으면 어느 시기가 되면 몸이 굳는다. 그래서 병이 되어 그의 삶이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이다. 
바르게 살고 싶으면 먼저 긍정적인 생활 가운데서 긍정적인 삶을 일깨워서 모든 사실이 감사로 이어지게 하자.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우리의 모든 사실을 지켜보고 계신다면 우리가 삶에서 감사하지 못한 것을 좋아하실까? 건강하지 못한 것을 기뻐하실까? 
부모가 자식을 때리고 아프게 하는 것은 그 자식이 잘 되라고 하는 것이지 나쁘게 하고자 함이 아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어려움은 우리를 일깨우시기 위한 사랑의 방편이다. 

문제는, 자기 삶을 항상 자기의 조건 안에서, 자기 바램대로 해버리기에 자기의 모든 소원과 조건들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도 살리셨다. 문제는, 나 스스로가 그 사실을 부정하고 믿지 않기에 그러한 사실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아는 식견에서 모든 사실을 정리하기에 자기의 한도 내에서 삶이 주어지는 것이다. 
“나는 내가 해야 된다. 나는 안 된다” 그러기에 안 되는 것이다. 
진짜 믿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믿는 사람의 행각에 서서, 믿고 따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2005.02.20.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