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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49. 은혜가 스쳐 가지 않게 내어놓는 삶

  • 등록일 : 2025년 12월 17일
  • 조회수 : 251

★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새,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눅1:8~16)

 

 

지난날 신앙인들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자기의 삶을 바르게 정립시키지 못하고 자기의 갈 길을 바로 아는 것이 어렵다. 

나름대로 수도하며 자기의 생활을 정립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자기의 삶을 내어놓고 하는 사람들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나름대로 ‘찬송한다’ 하고 ‘기도한다’ 하지만 진정 자기의 삶을 내어놓고 하는 찬송과 기도가 있어야 한다. 

 

누구나 찬송할 수 있고 누구나 기도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의 삶을 내어놓고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또한 자기의 삶을 내어놓아도 준비하고 갈고 닦은 바탕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차라리 자기의 위치관을 바로 알아서 ‘나에게 맡겨진 달란트는 이것이기에’ 또는 ‘나에게 맡겨진 달란트는 이것이 아니기에’ 하고, 자기 자신을 분명히 알고 자기가 서야 할 자리에 서는 것이 지혜롭다. 

 

옛말에 ‘누가 장에 간다고 하니 거름 지고 장에 간다.’하는 말이 있다. 

자기의 위치관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데 자기의 위치관을 모르고 분간 없이 행동할 때 경거망동하게 된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우리 자신을 세밀히 돌아보고 아름답게 가꿀 수 있어야 한다. 

 

지난날 신앙의 선열들을 살펴보면 자기의 삶을 내어놓고 생활한 사람만이 증거를 보았다. 

그렇지 않은 경우, 하나님께서 은혜를 입히시고 증거를 보이셔도 그 증거를 자기 것으로 바라보지 못하더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어 홍해를 건너게 하고, 광야 생활에서 만나를 먹이고, 메추라기로 고기를 먹이고, 반석을 깨서 물을 먹여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할 때는 끝내 그 증거가 자기 것이 되지 않았다. 

은혜를 입고 그 사실이 자기에게 도달해도 그 사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는 결국 그 은혜가 자기 앞을 스쳐 가고 만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자신을 세밀히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입히신 그 일이 내 앞을 스쳐 간다면 참 서글퍼진다.

“성탄절을 통해서 내가 다른 것은 못 해도 몸으로 하는 것은 할 수 있다. 내가 몸으로 하는 것은 못하더라도 물질로 대신하겠다. 내가 몸도, 물질도 안되니 다른 사람에게 위로의 말이라도 하겠다.” 

이것도 저것도 못 한다면 끝내는 은혜를 스쳐 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일, 즉 봉사하는 일을 통해서 자기의 생명을 되찾는다고 했다. 

내가 봉사하지 못할 때는 내 물질을 통해서 또는 봉사하는 사람을 도와서 자기의 위치관을 찾아야 한다. 

하지 못할 때는 결국 그 사실들이 자기 앞을 스쳐 가고 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를 입지 못했을까? 모두가 은혜를 입었다. 

하지만 그 일에 감사치 못하고 자기 것으로 보지 못하는 바람에 은혜가 자기 앞을 스쳐 가서 끝내는 망하는 길로 가게 되었다. 

하나님을 ‘안다’ 하고 ‘믿는다’ 하는 우리들도 그 삶을 바로 따라 붙이지 못하고 생활에서 바르게 안착되지 못하면 결국은 그 사실이 우리 앞을 스쳐 가게 된다. 

 

교회가 연혁을 자랑하는 것도 그 속에 기도하는 사람, 찬송하는 사람이 있기에 자랑하는 것이다. 

사탄이 원래 찬양하는 천사라는 설이 있다. 

결국은 월권행위를 하는 바람에 쫓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먼저 방해받는 것이 찬양이다. 

찬양이 방해받으면 그 교회는 흔들린다. 

그러기에 찬양이 방해받지 않도록 기도하고 따라 붙이는 것이 가장 지혜롭다. 

 

수많은 사람의 찬송이 울려도 단 한 사람, 살아있는 찬송을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신다. 

수많은 입술을 통해 찬양을 드려도 한 사람의 살아있는 찬양이 따라 붙이지 못하면 모든 찬양이 무효가 되고 만다. 

포수가 총알을 아무리 많이 쏘아도 짐승을 잡는 총알은 하나이다. 

이 사실을 바로 알아서 우후죽순처럼 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루어 드릴까?’ 하며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서로가 돕게 될 때 ‘사랑을 이룬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룬다.’라고 한다. 

 

우리의 삶을 바르게 정립한 후 찬송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우리의 삶을 정립하지 못하고 찬송해 봐야 소용이 없다. 

‘내가 어떤 삶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려야겠다. 내가 어떤 삶으로 바로 서야겠다’를 돌아보고 자신을 바로 정립하는 사람이 되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입히시는 것은 자기 자신을 되찾고 자기 자신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내가 창조주다. 내가 너를 창조했다.” 그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사람 만드시기 위해 은혜를 입히신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은혜를 입히는 것도 “너는 내 자식이다. 내가 네 아빠 엄마다.” 하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오늘날 성경을 풀이할 때 그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진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은 제쳐두고 인간의 바램에 서서 일을 정리하는 바람에 해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각자가 바라는 위치에 서서 찬송하고, 각자가 바라는 일에 서서 기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위치에 서서 찬송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위치에 서서 기도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기가 바라는 위치에 서서 “집을 사게 해주세요. 우리 아이가 잘되게, 우리 가족이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좀 좋으면 “우리나라가 잘되게 해주세요. 그래야 내가 잘되지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상에 내신 근본은 어디로 도망가고 없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해도 해답이 나오지 않고 돌고 돌아 원점으로 오고 만다. 

 

사람은 자기가 서야 될 위치를 바로 알고 난 뒤에 자기 할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입히심도, 부모가 자식에게 은혜를 입힘도 어디까지나 그 사랑을 알게 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이 사실을 바로 알지 못하면 어느 시기가 되면 내침을 당한다. 

내쫓김을 받는 그런 위치에 놓이지 않기를 바란다. 

 

진정 부모가 그 자식을 사랑한다면, 진정 자식이 그 부모를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아플 때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하고 쉽게 말하게 된다. 

부부간이라면 ‘차라리 내가 당신과 바꾸었으면 좋겠다.’ 사랑한다면 이런 말이 쉽게 나온다. 

그러다가 ‘아니야. 내가 아프면 어쩌겠나? 그러면 안 되지’ 이건 근본적으로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나아가다가 ‘이러다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서원해 버리면 어쩌겠나?’ 

이것도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속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 당시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생각한다고 “주여 그러지 마옵소서”(마16:22) 했을 때 예수님께서 가차 없이 “사탄아 물러가라”(마16:23) 하시며 가차 없이 잘라 버리셨다. 

각자의 위치관을 바로 찾아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뤄드리기 위해 우리에게 은혜를 입히실 때 믿고 따를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자. 

진정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삶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결핵환자를 찾아가 손을 얹고 기도할 때 ‘이러다가 저 사람의 병이 옮으면 어쩌겠나?’ 

그래서 ‘이 사람의 병이 옮겨오지 않게 하옵소서’ 인간적인 마음이 들면 그렇게 기도하기 마련이다. 

사실 환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인간적으로 봤을 때는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주여, 이 일에 간섭하여 주시사 사람의 상상을 벗어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근본을 모르고 내가 알고 있고 내가 추구하는 그 사실에서만 시작하게 되면 끝내는 우리의 삶이 빗나가고 만다. 사고가 빗나간다는 말이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자기 생각에 치우쳐서 사람의 생각에서 시작하는 바람에 결국은 빗나간다.

 

(눅1:8~16) 사가랴와 엘리사벳, 이 두 사람이 자기의 직무에 전념했던 것과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서 자기들의 형편을 앞세우지 않았던 사실을 보게 된다. 

또한 그들을 통해 태어날 요한의 삶을 통해 우리의 신앙관을 정립하게 하신다.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이 말은 ‘자기의 욕구나 세상에 취하지 아니하며’라는 말과 똑같다.

‘술을 금하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에 취하지 않고 자기의 욕구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했을 때 그의 삶을 통해 너도 기뻐하고 모든 사람이 기뻐하며, 이 사실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말이다. 

또한 자기의 삶을 앞세우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그 삶을 앞당겼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이런 사람을 들어서 사용하신다. 

 

성탄절을 앞두고 준비하는 것은 참 아름답다. 

하지만 진정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을 통해서 우리 속에 담아야 할 것이 담겨야 한다. 

이 일을 통해서 잃어버렸던 사랑을 되찾고, 사람됨을 되찾고, 우리의 할 일을 되찾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 마나가 된다. 지혜로운 모두가 되자.

 

(1999.12.12.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