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회소식
아회찬양선교재단의 다양한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2:8~14)
  
 
우리가 알지 못할 때는 나름대로 착하게, 나름대로 보람되게 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정작 그 사실을 바로 알고 나면 그 사실이 얼마나 부끄러운 사실인지 모른다. 
‘살생유택’이라 해서 불교에서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그 사실의 근원을 알면, 하나님께서는 살아있는 것을 우리 손으로 죽이게 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이 닫힐까 봐, 우리의 마음이 상할까 봐, 우리의 마음이 굳어질까 봐 못 하게 한 것이다. 
결과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판이하다. 
우리가 알고 있고 나름대로 펼쳐가는 이 지식이 우리 생각에는 다 맞는 것 같아도 또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에서는 그 사실이 맞는 것 같아도 정작 결과에 가서는 판이한 답이 나온다. 
그 사실을 알게 될 때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른다. 
 
조선시대는 여자들이 정조를 지키기 위해 은장도를 항상 품고 있었다. 
정조를 지키지 못할 때는 자기의 생명을 끊어서라도 정조를 지킨다는 관념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더 넓은 세상에 비춰보면, 수시로 다른 나라의 속국이 되어 종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으로 비춰볼 때는 종으로 팔려 가서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핍박받고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더욱 강하게 하셔서 생을 이어가게 하셨다. 
조선시대의 관념과는 판이하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조를 지키지 못해 자기의 목숨을 끊어버렸더라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벌써 없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개개인에게 바라시는 그 삶은 우리가 알고 있고 지식으로 보는 삶과는 판이하다. 
 
만물 중에 자기의 삶을 걱정하는 것은 사람 밖에는 없다. 동식물은 단 하나도 그렇지 않다. 
당장 내일 홍수가 나서 떠내려가는 물풀도 떠내려갈 때까지 기다리다가 자생하는 그 능력으로 삶을 이어간다.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하나님의 섭리는 판이하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세월이 갈수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이 지날수록 내 삶을 더욱 보람되게 살아야 할 텐데, 그런 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개개인의 걱정에만 치우친다. 
 
우리가 손으로 만든 물건들이 먼 훗날에는 골동품이 되어 그 값이 몇십 배, 몇백 배 값어치가 된다. 
나무도 수백 년이 지나면서 추워도, 더워도 자기의 삶을 열심히 살아서 그 값어치를 더해간다. 
돌 하나도 자기의 삶을 그렇게 값어치 없이 넘기지 않는다. 
유독 사람만이 해가 갈수록 히스테리를 부리고 다른 사람의 감사를 잃게 만들고 유독 사람만이 그 삶을 못 산다.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할 일에 몰두해 간다면 해가 갈수록 우리의 값어치가 더해진다. 
성경 말씀대로 “너희의 분량이 예수의 분량까지 자랄지니라”(엡4:13)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할지니라”(마5:48) 
문제는 우리의 삶이 자라지 못한 데서 벌어진다. 
자기의 삶을 돈독하게 살면 날이 갈수록 그 값어치가 더하고, 해가 바뀔수록 자기의 삶에서 품위가 드러난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과 같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실을 정립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제는 진정 이러한 삶을 살아서 ‘저 사람의 삶이 우리보다 몇 배나 더 가치가 있구나’ 이런 말이 주위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예수님 이후로 바울이 그 표본이다. 
한순간 쓰임 받는 것은 쉽다. 
이왕 쓰임 받을 바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쓰임 받자. 
지난날 사울도 한 번은 쓰임을 받았다. 하지만 끝까지 쓰임 받지 못했다. 
쓰임 받아도 이상하게 쓰임 받지 말자. 
유다 같은 쓰임이 아닌 이왕 쓰임 받을 바에는 우리에게 감사가 되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쓰임을 받자. 
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우리에게 감사와 기쁨을 더하셔서 더욱더 감사하는 삶으로, 더욱더 영광 돌리는 삶으로 살아가게 하실 것이다. 
 
(눅2:8~14) 성탄 절기는 기독교 사상의 근본이다. 
이 근본 사상을 흔드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요, 믿지 않는 자요, 방해하는 자다. 
그러기에 먼저 말씀의 근본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이 사실이 우리 신앙의 틀을 마련하고 우리 신앙의 근본이 되어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루게 되고, 모든 사람에게 참된 진리의 길을 알게 하는 일에 쓰임 받게 된다. 
 
예수님의 탄생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 사실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생활에 바르게 담게 될 때 이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사와 기쁨을 더하실 것이다. 
이 삶을 살지 못하고 배척하는 바람에 우리 스스로가 어려움을 자초하는 것이다. 
아무리 기도하고 예배드려도 이 사실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할 때는 모든 사실이 어그러진다.
다시 말하면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라야 내 자식이고 내 속으로 낳지 않으면 나와는 상관이 없고 내 가족이 아닌 이는 상관이 없고. 
만일 이러한 사상이 뿌리 깊이 내려 있다면 하루속히 고쳐야 한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47)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21:31)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이라면 내 속으로 낳지 않았어도 우리 무리 속에 있는 자식이라면 내 자식같이, 무리 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내 형제같이 지낼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시간이 갈수록, 해가 바뀔수록 우리 삶의 가치가 더하게 삶을 살아야 한다. 
포도주도 세월이 갈수록 몇십 배의 값어치가 되는데, 우리는 오늘보다 내일, 내일보다 모레가 더 값어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성탄절이 지나가더라도 우리의 생은 우리의 삶이 다하는 동안 계속 이어진다. 
예수님은 성탄에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 생활에서 매주, 매일, 매시간 태어나신다. 
나를 위해서, 나에게 감사와 기쁨을 더하시기 위해, 내 생활에 새 힘을 더하시기 위해 매번 매 순간 태어나신다. 
 
(1999.12.19.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