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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53.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등록일 : 2026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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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16:24~25)

 

 

학생이 학교에서 수업을 받을 때 교사의 지도에 따라서 모든 행동을 한가지로 모을 때 교육이 되듯이, 주일 날 모여서 예배드릴 때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그 일에 우리의 삶을, 내 모든 조건을 접을 때에만 가능하다. 

일하는 사람들이 다치거나 문제가 생길 때는 항상 일을 시키는 사람의 바램을 뒤로 두고 자기의 생각대로 할 때 사고가 생기고 문제가 생긴다. 

그러기에 일단 예배에 접하면 모든 사실을 다 접고 예배에 합당한 자세를 갖추는 것이 우선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을 갖출 때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의 삶을 지켜나갈 수 있다. 

 

전쟁터나 사격장에서 사격하는 사람이 조준하는 그 눈길을 흐려버리면 제 아무리 날고 기는 명사수라도 총알이 엉뚱한 곳으로 가버린다. 

다시 말하면 생각이 흐려져서 결국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매사가 삐딱하게 가서 그 사람은 교육을 시켜도 교육과는 아무 상관없는 길로 가고 만다. 

 

우리의 삶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길이 흐트러지지 않는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이 되자. 이런 사람에게만 모든 것이 가능하다. 

지난날이나 지금이나 또 우리의 과거에서도 이런 사실이 계속해서 벌어진다. 

이런 오류가 벌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우리가 찬송하거나 말씀을 나누고자 할 때는 더하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의 생활과 현실의 생활 자체가 대치되는 조건들이 항상 우리 앞에 대두되기 때문이다. 

우리 내면의 생활과 현실의 조건들이 대치되면 우리의 삶이 삐걱거리고 바른 길로 가지 않는다. 

 

강물을 보면 신기하게 강의 중간에 있는 물길은 거침없이 흘러가지만 강가나 강기슭에 있는 물길은 주위의 조그마한 조건에도 거슬려서 가지 못하고 물이 뱅뱅 돌아간다. 

중간에 있는 물은 계속해서 흘러가도 강가 즉 땅과 접해있는 조건에서는 그 물이 흘러가지 못하고 혼탁해진다. 

그래서 강가쪽 물은 더럽다. 왜냐하면 그 일이 쌓이고 쌓여 물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그곳에 발을 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이왕이면 깨끗한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우리의 생활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램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어디에 서야 될지 자신을 가늠하는 사람으로 자라가지만, 그러한 일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자기 임의대로, 자기 편한 대로 하면 결국은 그 일이 흐려져서 끝내는 물을 떠내게 된다. 

물을 떠낸다는 말은 버린다는 말이요, 사람으로서는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또 우리가 ‘예표의 사람들’이라는 말을 한다. 

하나님께서 어느 누구의 삶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뜻한 바가 있을 때 그 사람을 예표로 들어 쓰신다. 

신약 이후로 첫째 예표가 예수님이다. 

‘믿음의 삶을 지킨다’는 말 자체가 예표 된 사람의 대열에 들어서고자 한다는 말이다. 

예표의 대열에 들어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관하셔서 우리의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신다. 

예표의 대열에서 벗어날 때 이러한 사실이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진다. 

 

예배에 앉아있어도 눈길과 생각이 다른데 가있으면 그 사람은 예표의 사람으로서는 가치가 없다. 

‘예배를 드린다’는 말 속에는 내가 예표의 사람의 대열에 들어가고자 한다는 말이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그 대열에 서서 삶을 살지 않으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예배의 무리에 앉아 있다고 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표의 삶을 내 삶에 옮겨갈 때에만 가능하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근본적으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부모로부터 생명을 받아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셨기에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살아있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내 삶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비록 그가 알든 모르든,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그에게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을 주관하시기에 그를 깨닫고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 등산하러 갔다가 사고가 생기기도 하고 그 일을 통해 ‘아하, 내가 이날은 이래서는 안 되는구나’ 딴짓을 하다가 일이 생기면 ‘아하, 내게 돌아오라고 지시하시는구나’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발걸음을 옮겨서 차츰 예표의 사람의 대열에 들어서게 이끌어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방편이다. 이것을 범사라 한다. 

 

그래서 “너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하셨다. 

이런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갈 때 우리의 갈 길이 바르게 인도받고, 이런 사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관하시고 우리의 삶을 통해 역사하신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그 일에 쓰임 받는, 이끌림을 받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성경을 어렵게 보면 한도 끝도 없이 어렵지만 쉽게 보면 그 무엇보다 쉽다. 

“나를 사랑하셔서 주셨구나!” 하면 끝난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성경을 잘 아는 사람도 찬송을 많이 불러본 사람도 아니다. 

강도짓과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언제 찬송하고 성경을 볼 수가 있었겠나?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기에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삶을 보고 돌아서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하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2~43)하셨다. 

한 순간이다. 그 짧은 시간에 그 사람이 구원을 받은 것이다. 

 

사람이 제 아무리 죄를 저질렀어도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땅위에 있는 영을 가진 사람이라면 단 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은 그들이 나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갈 수 있게 예표의 사람으로서, 예정된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할 일이다. 

 

우리가 우리 삶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표로 삼으시고 예정하셔서 부르셨기에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범사를 통해 우리의 삶을 주관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예배에 앉아있고 싶어도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사랑을 알리시고자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말은 ‘나’라는 사람을 통해 내 조건에 걸맞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시고자 나를 예정하시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고자 하셨다는 말이다. 

우리가 예표의 사람이라면 모두가 선교사가 되어야 정석이다.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교사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다시 말하면 ‘나’라는 사람이 거울이 되고 작은 빛이 되라는 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세상의 소금이라”(마5:13~14) 우리가 빛이 아니라 빛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비추시기에 우리는 작은 빛이다. 

내가 빛의 매개체가 될 때, 빛 되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알리는 일에 쓰임 받는 내가 될 때 누구나 선교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나로 통해서 사랑을 말씀을, 나로 통해서 빛의 말씀을 증거 할 때는 모두가 선교사다. 

 

우리네 삶에서 참 가치관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빛 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는 빛이 되라. 소금이 되라. 너를 통해 사람들이 사람의 참 가치관을 깨달아서 자기의 갈 길을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너희의 할 일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일이 그 일이다. 이 일을 위해 내가 보내심을 받았다. 내게 비침을 받은 사람이라면 너희도 이 같은 삶을 사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이렇게 우리에게 반문하신다. 

 

우리를 불러 모으신 뜻대로, 나를 부르신 뜻대로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해 부르신 곳이 예배당이고 이 일에 합당한 찬송을 드리고 말씀을 들을 때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이다. 

예배는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깨닫게 된 사실을 내 주위에 알려서 빛을 비추는 것이 참 믿음의 사람의 할 일이다. 

 

이 사실을 알리는 일에 쓰임 받는 우리가 되고 우리의 삶을 온전히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다 드리면 무슨 재미로 사나요?” 하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삶을 살 때 우리에게 감사와 기쁨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내 멋대로 살면 참 재미있을 것 같지만 그 결과가 아름답게 주어지지 않는다. 

 

빛을 받고도 그 사실을 비추지 않을 때는 도둑이 된다. 

비춤을 받고 그 사실을 내 것으로 챙겨서 내 주머니에 넣어버리면 결국은 도둑이 되는 것이다. 

빛을 비췄을 때는 그 빛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요구하시는데 그 삶을 살지 않고 내 주머니에 넣어버린다면 결국은 자기 삶에 덫이 된다. 

이런 지혜롭지 못한 일을 벌이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억지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좋아서 스스로 그 길을 갔다. 

그들이 두려웠더라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를 예표로 삼으시고 내 삶을 예정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깨달음이 주어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배를 마치고 나면 때가 주어지는 대로, 조건이 주어지는 대로 말씀을 전하고 그들도 똑같은 믿음의 삶에 발걸음을 옮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참 믿는 사람의 할 일이다. 

이러한 삶이 주어지게 바르게 협력하고 바르게 이루어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역사하시고 꼭 도우실 것이다. 

 

“나는 형편이 왜 이럴까? 나는 조건이 왜 이럴까?” 이렇게 한탄하기보다 현재의 조건에서 나를 택하심에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발돋움하면 우리의 삶이 급부상한다. 

먼저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감사치 못하면 그 사람은 일어설 기력이 없다. 끝내 좌절하고 만다. 

“나와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을 이끌어 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내정하셨다. 나를 택하셨다. 나를 예비하셨다.” 이렇게 보는 것이 가장 맞다. 

왜냐하면 나와 똑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은 내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사랑을 증거하고 그들이 자기의 길을 가게 만드는 것이 참 믿는 사람의 할 일이다. 

믿음의 삶을 전수하는 일에 바르게 쓰임 받는 우리가 될 때 모두가 선교사가 되고 모두가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쓰임 받는 동력자가 된다.

 

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꼭 해야 될 일이 있다. 

예배를 드리는 심령 자체는 그릇이다. 

이 그릇에 감사를 담아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라면 이물질을 담기지 않아야 정석이다. 

어떤 것이 이물질이냐? 내가 감사치 못한 일들, 내가 용서치 못한 일들이다. 

용서하지 못하면 내 감사의 그릇이 구비되지 않는다. 용서할 때에만 감사의 그릇이 구비된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감사의 그릇이 준비되게 용서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왜 예수님을 보내셨을까? 하는 사실이 중요하다. 예수님을 보내지 않고는 되지 않았을까?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의 삶을 통해 이루실 일을 벌써 작정하셨다. 

우리를 이끌어 가시려면, 그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면 그러한 조건 없이는 할 수 없었다. 

참 사랑의 가치관을 우리 속에 심으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은 우리를 이끌어내시기 위한 사랑의 방편이다. 그래서 ‘예표’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새로이 지음 받은 사람이라면 새로이 지음 받은 사람답게 행동해야 한다. 

나로 인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나타내는 일에 쓰임 받는 우리가 될 때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그 가치관이 드러난다. 

이러한 일에 쓰임 받는 모두가 될 때 선교사가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삶을 통해 참 삶의 가치관을 만들어 내는 일에 바르게 쓰임 받는 우리가 된다면 하루를 살아도 후회 없는 삶을 살게 된다. 

 

(2010.01.03.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