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회소식
아회찬양선교재단의 다양한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을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석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눅16:1~16)
 
 
사람의 눈은 보라고 주셨다. 하지만 못 볼 것은 보지 않아야 정석이다. 
볼 것은 세밀히 보더라도 보지 말아야 될 것은 안 보는 것이 정석인데, 보지 말아야 될 것을 보는 바람에 어려움을 자초하고 없는 조건을 더하게 된다. 
우리의 귀도 들을 것을 들어야지, 듣지 말아야 될 것을 들으면 자기의 삶을 망치게 된다. 
보지 말아야 될 것을 보고, 듣지 말아야 될 것을 듣는 바람에 결국은 자기의 삶을 스스로가 폐쇄시킨다. 
 
사람이 가야 될 곳이 있고 가지 말아야 될 곳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지렁이는 밟아도 우리에게 피해를 주지 않지만 뱀을 밟으면 물리거나 잘못하면 자기의 생명을 잃기도 한다. 
우리가 가지 말아야 될 곳, 먹지 말아야 될 것, 보지 말아야 될 것, 듣지 말아야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막상 그 일에 도입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속아서 자기의 삶을 스스로가 내동댕이친다.
 
이런 일들이 왜 벌어질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범사를 통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신다. 
어린아이가 젖을 떼어야 할 때는 부모는 힘들어도 젖을 떼게 한다. 
우리 생각에는 별것 아닌 것 같아도 그 아이에게는 자기의 생명과 맞바꿀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다. 
그러면 어린아이 때만 그럴까? 더 자라서 부모의 품을 떠나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도 그렇다.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을 따라야 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따라서 하려고 하니 싫은 마음이 들 것이다. 
하지만 자라기 위해서는 새로운 세계에 도입할 수 있는 조건을 익혀야 한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내가 꼭 이렇게 해야 되나?”하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해야 한다. 
 
사람은 상대방이 자기가 생각한 수준에서 벗어나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범사라는 조건을 통해서 우리를 키워가신다고 말씀하신다. 
“너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잠3:6) 
누구를 위해서?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위해서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은 항상 잣대를 준비한다. 
믿는다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잣대를 준비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잣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잣대를 준비하는 것은 잘못하는 것이다. 
생긴 모습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르기에 그 사람에게는 다른 길이 있다. 
누구를 힐난하거나 지적하지 말고 각자의 자리를 잘 지켜야 한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사탄의 궤계에 속는 것도 자기 길을 가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은 사랑하는 것밖에는 없다. 
사랑하는 것 외에 하는 것은 귀신의 행각이다. 
믿음의 사람이 사랑하는 것 외에 한다는 것 자체가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각 사람은 생긴 모습, 생긴 조건대로 자기의 길을 가야 한다.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다. 지나온 세대나 다가올 세대를 다 합쳐도 똑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다는 말은 각자에게 주어지는 범사가 다 다르다는 말이다. 
 
사람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러다가 내가 죽지 않을까? 이러다 내가 망하지 않을까?” 
아니다. 자기가 어긋난 길로 가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기에 그를 인도하시기 위해 그 길로 이끄실 뿐이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범사를 통해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주위에서 잣대로써 “나쁜 짓을 했어. 무슨 짓을 했어”라고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허락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사탄이 하는 것이지 사람이 누구를 판단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약 그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부모된 입장에서 사랑으로 하는 것은 좋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다. 
 
사람은 각자마다 주어진 분량이 다르다. 그 사람에게만 맡겨진 조건이 있다.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가야 할 길이 있고 각 사람은 자기의 길이 다 있다. 
그 길로 이끄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범사를 통해 그의 삶을 이끌어 가신다. 
진정으로 그를 사랑한다면 그를 판단하지만,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같은 부모에게 태어난 자식이라도 자기만의 길이 있다. 
단 한 사람도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은 없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함부로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 
하게 되면 그 대가는 본인이 치르게 된다. 
내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렇게 하라. 
부모는 그 자식을 두들겨 패서라도 가르쳐간다.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역사하시고 각자가 가야 될 범사를 우리의 심성과 조건에 맞춰 이끌어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신다. 
자기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서 ‘이건 이럴 거야. 저건 저럴 거야’에서 시작하지 마라. 
그 일을 판단하고 싶거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데부터 시작하면 그를 꾸짖어도 좋고, 판단해도 좋다. 
왜냐하면 그를 사랑해서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짓은 일점일획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여가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신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신 것도 예수님께서 그의 몸에 붙어 있는 사탄을 보았기에 “사탄아, 물러가라” 하신 것이다. 
“누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라고 말하지 마라. 누구는 그렇게 이야기해도 나는 하지 말아야 정석이다. 
엄마가 자기 자식을 때린다고 ‘저 아이는 때려도 되는 아이인가 보다’ 해서 같이 가서 때린다면 그건 잘못된 것이다. 
엄마는 자식을 바른길로 이끌기 위해서 사랑으로 때릴지라도 주위 사람들까지 그렇게 하는 것은 안 된다.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떠한 행동도 잘못된다. 
땅 위에 수십억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사람의 몸에는 37조의 세포가 있지만 각 세포는 자기의 일을 따로 한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내가 선 자리에서 내가 지켜야 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가자.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자체가 잘못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어려움을 타파하려고 발버둥 치지 마라. 
내가 현재 어려운 일에 얽매였다고 발버둥 치지 마라. 
우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한 조건으로 우리 앞에 두신 것이다. 
그 어려움이 우리를 죽이려고 하신 방편은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깨닫고 돌아서면 어려움은 금방 물러간다. 
 
예수님 당시에 문둥병을 천병이라고 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어루만져서 문둥병을 낫게 하셨고,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신 후 제사장에게 가다가 깨끗하게 되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침과 진흙을 이겨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니, 그의 눈이 밝아졌다. 
모두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를 진정 사랑하셨기에 그의 삶을 일깨우신 것이다. 
 
모르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모두 네 팔자다. 맹인으로 지내고 문둥병자로 지내라”고 한다. 
그런 말을 하기에 앞서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주어졌을까? 내 주위 형제들이 그런 어려움을 들고 다가왔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한 번쯤은 되뇌어보고 그에게 주어진 일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풀어가시는지 세밀히 지켜보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가자. 
 
힐난하기 앞서서, 그의 상황을 입방아 찧기에 앞서서 그의 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풀어가시는지 옆에서 지켜보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이런 사람이 될 때 우리의 삶을 통해 영광 받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역사하신다. 
 
성경에서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일을 천국과 지옥에서 보게 하셨다.(눅16:19~3) 
이런 사실을 안다면 현재 내 삶에서 내 주위의 일들을 판단하기에 앞서서 그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그를 바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범사인 것을 기억하자. 
그 일이 그 사람 인생의 다는 아니다. 
그러기에 그 일이 그 사람의 조건을 얽매지 못하게, 그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먼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 
 
내 주위 형제들이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 어려움을 통해서 힘든 것도 이해가 간다. 너의 어려움을 보니 나도 답답하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도울까?” 
어떻게 해야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길로 자기의 삶을 옮겨갈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서로가 덫에 걸리지 않게 지혜롭게 풀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이런 아름다운 역사가 우리 개개인에게 주어지기를 바란다.  
이런 우리가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신다. 
자칫 잘못해서 스스로가 덫을 거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자라지 않기를 바란다. 
 
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기본적으로 이 사실이 바르게 정립된 후에 예배드려야 진정으로 아름다운 감사의 예배가 된다. 
그냥 예배를 드렸으니 되었다가 아니라 예배드림을 통해서 자기의 삶이 자라고, 예배드림을 통해서 내 주위 형제들과 사랑 이룸이 바르게 정립될 때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서로가 합심한 그 조건이 하나님께 상달될 때 예배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내 삶을 온전히 드리는 아름다운 예배가 이루어지게 될 때 ‘하나님께서 나를 왜 빈곤한 자리에 두셨는지, 나를 왜 부유한 자리에 두셨는지’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그 삶을 통해 나만이 해야 될 일을 알게 하신다.
 
현재 자기의 위치와 처한 조건은 자기가 가장 잘 안다. 
살아가는 동안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이 나를 따라오게 만드신다. 
그 사람에게 그 일을 바르게 전해주려면 그 길을 걸은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삶에서 함부로 어떤 사실을 입방아 찧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해도 된다. 그렇지 않으면 하면 안 된다. 
 
누구를 힐난하고 원망하기에 앞서서 “너를 만나서 감사하다. 네가 옆에 있어서 감사하다. 너와 다투어도 다툼을 통해서 허물을 털어버리고 더 돈독하게 하시니 감사하다” 
이렇게 진정 사랑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신다. 
 
“우리의 평생의 과업을 먼저 아신 하나님께서 각자의 형편 처지를 따라서 우리에게 구역을 정하시고 범사를 통해 우리를 이끄심에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빈곤한 역할, 어떤 사람에게는 부자의 역할, 어떤 사람은 높은 지위, 어떤 사람은 낮은 자리, 하지만 모두가 조건에 맞게 허락하심에 감사하는 데부터 시작하는 우리가 되자.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심성과 조건을 허락하시고 그를 이끌어 가심에 진정 감사로 화답한다면 모든 사실이 아름답게 이어진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매사, 우리의 조건에 맞게 허락하심에 우리가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어떠한 조건이 주어지더라도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일에 바르게 쓰임 받으리라” 하는 믿음의 삶을 지킨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실을 통해 역사하실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매사,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사실을 먼저 아시기에 우리에게 허락된 조건들이다. 
(눅16:1~16) 이 말씀을 우리에게 허락하심은 현재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이기에 허락하신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의 행동이 비록 자기 돈도 아니고 자기가 행한 일이 잘못된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일 후에 자기의 삶을 아름답게 꾸리기 위해 지혜롭게 했던 것을 예수님께서는 힐난하시기보다 지혜롭게 그 일을 정리해서 훗날 자기의 삶을 정비해가는 그를 지혜롭다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예수님의 피 공로로 의로운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진정 믿는 사람이라면 이같이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나? 오히려 우리에게 반문하는 말씀이다. 
‘너희가 진정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네 주위 형제들이 어려움을 겪거나 잘못된 일이 있을 때 그 일을 들추어서 그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 맞느냐? 그 일을 덮어서 아름답게 될 수 있게 그를 타이르고 그 일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좋겠느냐?’ 우리에게 묻는 것이다. 
 
주인에게는 그 돈이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다. 비록 불의한 청지기지만, 그가 그렇게 정리함으로써 주인에게는 조금 손해를 입혔어도 자기도 보호를 받고 주인에게 힐난 받지 않게 지혜롭게 했기에 ‘참 지혜롭다’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은 우리가 비록 잘못된 길을 갔을지라도, 잘못된 일을 했을지라도 우리의 삶에서 깨달은 사람이라면, 우리의 삶에서 되돌린 사람이라면 불의한 세상 조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이런 사람으로 발돋움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아시고 나를 세상에 보내신 줄 안다. 
하나님께서 실수해서 누구를 그 집안에 태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내 심성을 먼저 아시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 그의 범사를 이끌어 가신 것이다. 
이것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고 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범사는 누구도 피해 가지 못한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내게 주어진 범사를 나 스스로가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너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오늘 주어진 말씀에서 불의한 청지기가 ‘내가 주인에게 쫓겨나게 될 때 어디에 가서 빌어먹을까?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빚진 자들에게 가서 탕감해 주는 대신에 나를 기억해 달라고 하자’
이 사실을 주인이 지켜보니 참 지혜롭다. 
한편으로는 밉지만, 주인에게 완전히 손해를 입힌 것도 아니고 조금 손해를 보이고, 빚진 사람에게는 탕감받는 대신 네가 나를 좀 봐주면 어떻겠냐고 한다.
“참 지혜롭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자기의 잘못을 자기가 인정한다는 말이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기가 회개하고 돌아섰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기본자세는 밑바닥에 앉는 것이 정석이다. 
자기 자신을 안다면 자기 위치를 찾지만, 자기 자신을 모른다면 밑바닥에 앉는 것이 정석이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자기 위치를 알아서 그 일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역사하셔서 우리를 감사로 이끌어 가실 줄 안다. 
“나는 그런 적이 없다. 나는 그렇지 않아” 이렇게 변명하기보다 있는 조건을 인정하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역사하실 것이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네 삶을 먼저 아시고 계시기에 네게 주어진 일을 인정해라. 인정하면 네 갈 길을 인도하신다는 말씀이다. 
이런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가기를 바란다. 
땅 위에 태어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이 덫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 사실을 알거든 “나는 깨끗해. 나는 그렇지 않아” 이런 말은 하지 말자. 
“나를 정화시키기 위해 세상에 보내시고 깨닫게 하심 감사합니다”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네가 네 일을 인정하기에 앞으로의 삶에서 네가 감사로 받아들인다면 그나마 네 짐을 좀 가볍게 해주마”라고 하실지 어떻게 알겠는가? 
깨닫고 돌아설 때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하시고 우리를 감사케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인 줄 안다.  
 
사는 날 동안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지만 죄를 짓는다 해서 죄에 끌려다니지 말자. 죄에 끌려다니게 주위에서 충동질하는 것은 죄를 지은 사람보다 더 나쁘다. 
그런 사탄의 편에 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죄를 지적해서 끌려다니게 그것을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정죄하지 않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피 공고를 믿을 때 그 죄를 인정하지 않겠다 약속하셨다. 
그러니 우리의 삶에서 죄 지음에 나 스스로가 얽매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자. 
 
“나는 내 삶에서 언제 한번 떵떵거리고 살까?”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부자는 아무나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내게 왜 이런 부를 허락하셨을까?’ 내게 부를 허락하신 그 조건을 내가 되뇌이고, ‘부의 조건을 통해 내가 이렇게 삶을 살리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루어 드리리이다’ 
다시 말하면 부의 조건을 아름답게만 정리한다면 하나님께서 점차적으로 범사를 통해 그의 삶을 이끌어 가실 줄 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루어 드리는 일에 쓰임 받는 참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모두가 되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일에 쓰임 받는 모두가 되게 “내 삶을 보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이같이 도우셨소. 하나님께서 이같이 함께 하셨소” 
이 사실을 드러내는 일에 쓰임 받는 능력의 사람으로 자라가기를 바란다. 
 
우리의 삶에서 지혜롭게 사는 방법은 나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내게 심성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나만이 견딜 수 있고 나만이 지킬 수 있는 그 일을 먼저 아시고 내게 그 일을 맡기심에, 먼저 그 일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삶에서 그 조건이 감사로 이어진다.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인정하나, 인정하지 않나에 따라서 감사나 거부가 된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자기가 받아들이면 감사가 되지만 아무리 좋은 일도 자기가 거부하면 그 일은 감사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우리의 모든 사실을 간섭하신다. 
그러기에 내 삶에서 어떤 조건을 요구한다면 그러한 조건이 내게 주어지게 먼저 삶을 준비하라. 
내가 어떤 것을 추구하고 싶거든 추구한 그 조건을 먼저 마음에 담고 생활에 담아라. 
 
우리의 바램은 하나님께 상달된다. 분명히 주신다. 
현재 내 자리에서 감사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발돋움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내가 가야 될 길을 아시고, 내가 바라는 그 조건을 먼저 아시기에 우리의 갈 길을 꼭 열어주신다. 
이런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모두가 되자. 
 
(2010.01.17.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