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회소식
아회찬양선교재단의 다양한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5:1~12)
 
 
기본적으로 우리가 알아야 될 사실은 사람은 선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덮으시기에 우리가 그 모양을 띌 뿐이지 사람은 선할 수가 없다. 
우리를 선으로써 도포하시고 사랑으로써 덮으시기에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 같고 선한 것 같이 하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다. 
 
내 가정이 악해서 주위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저 가정은 망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더라도 내가 몸담은 가정은 내가 지키는 것이 기본이다. 
내 가정이 악하고 선하지 못하다고 내 가정을 떠나는 것은 악한 중에 악한 것이다. 
이것은 주위에 있는 잘못된 영들의 장난이다. 
자기가 그 가정을 사랑한다면 자기 가정이 악하다고 지적하기보다도 그 가정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이 정석이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면 남편이 빗나간다고 해서 그를 내던지기보다도 그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내놓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속으로 낳은 자식이 온갖 짓을 다 저지른다고 해서 “내 자식이 아니다.” 그건 있을 수 없다. 
자기 속으로 낳았으면 자기 자식이요, 죽어도 자기 품에서 죽게 만드는 것이 진짜 부모의 할 일이다. 
 
오늘날 잘못된 부류의 사람들이 이런 일을 저지른다. 
아무 악해도 내 가정은 내 가정이고, 아무리 악해도 내 남편은 내 남편이고, 아무리 악해도 내 아내는 내 아내고, 아무리 악해도 내 자식은 내 자식이다. 
가정을 저버린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딤전5:8)고 한다. 
그래서 내 가정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가정을 허락하신 것은 내가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지키지 못한 내 잘못이지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내가 내 가정을 위해서 희생할 때, 내가 내 가정을 위해서 수고할 때 내 자식이,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바르게 자란다.
“남편으로서 이럴 수는 없다.” 라고 한다면 남편으로서 이럴 수 없는 것을 그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아내의 할 일이다.
“남편을 위해서 내가 이렇게 수고했는데 그 일은 다 소용없는 것인가?” 수고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만큼 사랑했느냐다. 
 
내 자식이 빗나가서 망나니처럼 지내면 “이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니다.” 하고 내던지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돌아오도록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는 것이 옳을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어진 조건이라면 어떠한 조건도 그 일을 내팽개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점지해 준 그 일을 스스로가 폐쇄했기에 결국은 나도 버림받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게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이렇게 될 것을 모르고 하셨을까, 알고 하셨을까?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은 사람들이 이렇게 폐쇄적으로 흘러갈 것을 다 아시고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르고 아담을 지으시고 난 뒤에 하와를 지으신 것이 아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2:18) 라는 단서를 붙이셨다. 
하나님께서 몰라서 하신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하와를 지으실 수 있었지만 기다리신 것이다. 
 
우리네 사람들이 이렇게 폐쇄적으로 흘러갈 것을 다 아시고 기다리셨다가 다시 아담을 위해서 하와를 허락하신 것이다. 
그것도 아담의 갈비뼈를 빼서. 이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네 몸과 같다는 말이다. 
그것을 자기 뜻에 안 맞고, 자기 조건에 안 맞는다고 내던지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내던지는 것과 같기에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실 수가 없다. 
 
우리네 심성을 아름답게 고르시고 아름답게 안착시키기 위해서 성격이 똑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사람을 만나게 하신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이끌어내시기 위한 사랑의 방편으로써 나와 정반대의 사람을 만나게 해서 태어난 자식을 보면 한 아이는 아빠를 닮은 것 같고 하나는 엄마를 닮은 것 같다. 
그래서 부모가 하는 말이 “재는 아빠를 닮아가지고, 재는 엄마를 닮아가지고” 이렇게 말한다. 
골고루 섞어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에 합당한 조건을 만들어 가시려고 우리에게 조건을 허락하신 건데 그 일을 자기가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진정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생각조차 바뀌어야 한다. 
 
그러기에 아무리 악조건이라도 내 심성을 먼저 아신 하나님께서 나를 이끌어내시고 쓰시기 위해 주신 조건이기에 우리가 해야 될 일은 감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로운 자의 할 일이다. 
내게 주어진 조건을 이겨내는 방법은 감사로 받아들이는 방법 외에는 없다. 
그러기에 진정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을 사랑한다면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 이러한 사실을 겪지 않게 자신의 일부터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자식을 바루려고 하지 말고 근본 된 자기 자신을 바루면 자식은 자연히 발라진다. 
아빠 엄마, 두 사람의 조건만 화합이 되면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은 자연히 정상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다. 
 
자식을 바루려고 하지 말고 부부가 화합해서 사랑가운데 자식을 갖고 자식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훈련을 시킬 것을 다 시켜야 정상이다.
자식을 낳은 뒤에 훈련시키려고 하지 말고 내 뱃속에 있을 때 훈련시켜 놓으면 그 자식은 정상적으로 자라간다. 
나로 인해서 주어질 자식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내 바램대로 함부로 정리하기보다도 부부가 뜻을 합해서 “이런 자식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일을 위해서 마음을 합해서 서로가 사랑을 나누게 될 때 하나님께서 자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하는 좋은 조건을 허락하신다. 
 
세계적으로 뛰어난 영재들은 누구도 사람에 의해서 영재가 된 사람은 없다. 
누구에 의해서 수학을 받아서 영재가 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부모 된 사람들이 자기의 삶에서 “우리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받지 못했던 것, 하지 못했던 것을 이 아이를 통해서 이 사실을 이루어 우리의 바램을 이루어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서로 상의하고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준비해서 아이를 갖게 될 때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후대를 허락하신다. 
 
독신인 경우는 “나의 바램을 통해 주어질 귀한 가정을 통해 내가 바라는 바램의 자녀를 보게 하소서. 비록 내가 배 아프지 않고 힘들지 않고 낳은 자식이지만 내 마음과 정성을 드려서 보게 된 아이를 통해서 내 평생에 감사케 하소서” 
하게 되면 그 아이는 자기 속으로 태어나지 않았어도 아이가 그 일을 다 기억하고,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그 사실을 통해 감사할 수 있는 길을 허락하신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우리네 사람의 생각이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정석이다. 
 
오늘 말씀(마5:1~12)은 산상수훈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통해서 생성될 그 조건들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는 세상을 일구어내시기 위한 방편으로써 주신 사랑의 메시지다. 
그러기에 우리를 위해서 주신 사랑의 메시지이고, 사랑의 방편으로써 주신 것이기에 이 일을 얼마만큼 이수하고 따르나, 따르지 못하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결판난다. 
세상을 탓하고 내 주위를 탓하기에 앞서서 내가 먼저 이 일을 계획하고 틀을 만들어 놓으면 찍어내면 그대로 나온다. 
이렇게 해나갈 때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신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의 바램대로 삶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부부간이라면 한 날 한 시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생사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으로써 하나로 응집된다면 누가 먼저 가고 뒤에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에 얼마만큼 내게 주어진 일을 사랑으로써 표현하나, 하지 못하냐에 따라서 결판이 난다. 
누가 먼저 가고 나중에 가든지 살아있는 동안에 사랑으로 보듬어서, 사랑하는 사람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에 적합한 내 삶을 살았나, 못 살았나에 따라서 결판이 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일생을 살다가 떠날 때 그 마음의 여운이 평생 남을 수 있게 서로가 대화로써, 사랑으로써 보듬는다면 먼저 가든 뒤에 가든 두려움 없이 그 일을 기다리고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에 내가 사람 된 본분으로써 삶을 정비하면 세상을 떠날 때 두렵지 않다. 
 
문제는 사람이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두지 않고 내가 보고 있는 그 일에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해답이 없는 것이다.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나’라는 사람을 완성시키기 위해 조건을 허락하신 그 사랑에 부합된 삶을 산다면 해답이 나온다. 
그러기에 사람의 조건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신 그 조건에서 찾으면 해답은 금방 나온다. 
 
그러기에 먼저 가는 사람은 먼저 갈 수 있게 “당신이 바라던, 이루지 못했던 모든 사실 후대인 우리가 꼭 이루어드리겠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그 일에 삶을 드리고 또 그 일을 이루어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했으니 우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떠나세요. 먼 훗날 다시 뵙겠습니다.”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는 것이 할 일이다. 
 
우리네 삶에서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바보 중의 바보다. 
그것으로 끝나면 천만번 다행이지만 끝나지 않는다. 다시 그 일이 반복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같이 예비하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보이셨는데 이 사랑에 부합 된 삶을 살아드리는 우리의 모습으로 자라가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되자. 
이 같은 삶을 살도록 현재의 삶에서 서로가 서로를 꼭 보듬어가는 참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바램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세상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심령이 가난하다고 한다. 
내 일이 잘되든 안 되든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나를 일깨우시기 위해 주신 사랑의 방편이기에 ‘내가 이런 일에 흔들려서는 안 되지’ 하는 것이 중심에 잡혀있어야 한다. 
‘내게 무슨 일이 있든 상관없이 나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주신 사랑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나와 내 가정이 되게 하소서’ 하고 흔들리지 않아야 심령이 가난하다고 하는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세상적인 욕구를 버리지 못하면 볼 수 없다. 현실에서의 바램, 현재의 조건을 뛰어 넘지 못하면 항상 거기서 맴돌기에 올라가지 못하고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시고자 주신 사랑의 조건이기에 이 조건을 뛰어넘을 수 있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사실이 아름다워진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그러한 사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만 긍휼히 여길 것이 아니라 씨앗이 자라서 꽃을 피우듯이 긍휼이 나날이 자라가야 한다.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 삶을 통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이수하기까지 머물지 않을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일을 저질렀을 때 그 일을 본인의 일로 책임을 질 수 있나, 없나를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한다.
그러한 일이 주어졌을 때 그 일을 내 일로 보고 그 일을 내가 책임질 수 있나, 없나? 이것이 될 때 화평을 이룰 수 있다. 
“네가 잘못했잖아” 하고 지적하면 그 일에 대해 반문하고 변명하게 되지, 그 일을 인정할 사람이 별로 없다. 
어쩌다가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에게는 솔직하게 인정할지 모르지만 그 외에는 그렇지 못하다. 
화평케 한다는 말은 ‘이 사람은 내 허점을, 내 모든 일을 다 들어줄 것이다. 어떠한 말을 해도 내 모든 것을 가려주고 내가 바른 길로 갈 수 있게, 내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길로 갈 수 있게 도와줄 사람이다.’ 이렇게 믿을 수 있는 단계까지 자라줘야 이 말씀이 이루어진다. 
 
부모가 자식을 키워갈 때 자식이 실수를 하면 “그럴 수 있어. 괜찮아. 다시 해봐” 이렇게 가르쳐나간다. 
혹여나 뜨거운 것에 상처를 입을까봐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뜨거운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만들어준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화평케 한다는 말 가운데는 그 일을 내가 다 포용하고 관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그 일로 이끌어 갈 수 있게 “그 일에 내가 서 있을게. 걱정하지 마라” 하는 것이다. 
믿는 사람이라면 ‘화평’이라는 이 말씀이 진정 이루어지게 만드는 일에 쓰임 받는 모두가 되어야 한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사랑이 깃들지 않고는 화평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순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를 감싸고자 하는 조건이 없이는 화평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믿어라.”고 말하기보다 내가 먼저 믿는 사람으로서, 화평케 하는 사람으로서의 위치에 선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내 주위 형제들에게 보여주게 하실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키워나갈 때 어차피 아이는 세상 물정을 모른다. 
모르는 조건에서 나아가기에 부모 된 입장에서 자식을 사랑한다면 자식의 모든 허물을 덮어나가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에게 가정을 허락하심은 가정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보게 하시고 뛰어넘기를 바라신 것이다. 
 
성경에서는 “세리나 창기들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 의가 이들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마5:20, 46) 라고 단서를 붙인다. 
하나님을 믿고 믿음의 삶에 도입한 사람이라면 세리나 창기들도 똑같이 하는 이 단계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은 이것을 뛰어 넘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화평의 삶으로 옮겨가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야 한다.
 
‘나’라는 존재를 통해서 자기가 가림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그 품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진정 깨달은 사람이라면 화평의 삶에까지 자라가야 한다. 
우리가 화평의 삶을 살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시고 역사하실 것이다. 
우리를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이루시기까지 하나님께서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실 것이다. 
귀한 조건이 사는 날 동안 사랑 가운데서 바르게 이루어져서 택하신 뜻대로 바르게 쓰임 받는 모두의 삶이 되기를 바란다.  
 
※ 믿음의 삶에 처음 도입한 사람은 그의 삶 자체가 이주해 온 것이다. 
이주해 온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사랑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그를 가로막는 모든 조건, 그가 현재 뛰어 넘지 못한 조건들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실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허락하신다. 
하지만 한순간이다. 왜 끝까지 잡아주시지 않을까? 
문제는 자기 속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겉은 하나님께서 사랑 가운데서 그를 인도하시는 바람에 자라가지만 속은 그만큼 자라지 못하고 옛날 상태 그대로 있기에 어느 시기가 되면 원상태로 돌아간다.
원상태로 돌아가고 나면 하는 말이 “뭐 별 것 아니네. 내가 잠깐 속았나보다” 하고 생각한다. 
속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같이 보듬으신다는 것을 증거로 보이신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를 보게 되면 그것을 기억하고 기록해 놓았다가 잊지 않는 사람이 되면 그런 슬럼프가 없어진다.
이런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가자. 
 
(2010.01.24.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