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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61. 나로 인해서 사랑의 싹이 트게 하소서

  • 등록일 : 2026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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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10:34~39)

 

 

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세상 조건을 알게 되면 어른이나 아이나 다를 바가 없다. 

어른들은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다 보지만 아이들은 어릴 때 사랑하는 사람의 품안에서 자라기에 보는 폭도, 생각하는 폭도 좁기 때문에 착하게 지낼 뿐이지 만약 좋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되면 아이나 어른이나 똑같게 된다. 

 

그러기에 부모는 아이를 키울 때 세상의 조건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데까지 자라가는 아이가 되게 하소서”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에게 보여주신 가정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고 사랑을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관문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식을 낳지만 “이 자식이 어떻게 하면 세상을 누리고 살까? 어떻게 하면 세상을 재미있게 살까?” 

여기에만 치우치는 바람에, 부모들이 그렇게 키우는 바람에 후대들이 자라오면서 세상을 더 혼탁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이 그런 것이 아니라 부모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태어날 때는, 세상을 보지 않을 때는 부모의 사랑 가운데서, 형제간의 사랑 가운데서 자라서 아이가 그렇게까지 빗나가지 않는다.

아이들이 세상의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전부 보고, 듣고, 생각하면서 세상을 통해 걸어온다면 이 아이들이 자기 세대에서는 그 삶이 어떻게 될까?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서 이 어려운 세상을 휘젓고 나가게 할까?” 하는 것이 우선은 괜찮은 것 같아도 어느 시기가 지나면 이 아이를 통해서 세상을 더 혼탁하게 만들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이의 갈 길도 모호해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기는커녕 하나님의 사랑을 훼방하는 자리에 놓이게 된다. 

 

“세상 지식을 어떻게 익혀서 이 아이가 지혜롭게 살아갈까” 그것보다도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어떻게 도우실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도우시게 만들어가는 지혜로운 부모의 위치에 서야 한다. 

세상을 휘젓고 살아가는 아이가 되게 만들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지명하시고, 도우심을 받는 그런 아이로 자라게 협력하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지금은 아이들이 세상 문물을 너무 쉽게 받아들여 하나님을 바라보기는커녕 세상을 통해서 살아남는 방법만 익히다보니 약아지고 아이들을 못 쓰게 만드는 어리석은 일을 만들어낸다. 

 

지난 날 모세의 일생을 보면, 애굽의 바로왕이 이스라엘의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모세의 어머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띄웠다. 마침 바로의 딸이 아이를 발견하고 자기 아이로 키웠다.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이끌림 받는 아이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로 쓰임 받는 아이로 자랄 수 있게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에게 가정이라는 너울을 주신 것은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조건인데 “내 속으로 났기에 내가 어떻게 키워야겠다.”고 한다. 

그것도 좋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키우는 지혜로운 부모가 되자.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이로 자라가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는 기도가 일평생 끊이지 않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꼬마 두 명이 있는데 한 아이를 예쁘다고 했더니 옆에서 보던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 아이에게도 예쁘다고 말했더니 그만 토라져서 돌아보지 않는다. 

세상 일로 본다면 당연한 일로 볼 수 있겠지만 사랑의 개념에서 보면 참 서글픈 일이다. 

이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아이들도 이런 조건을 통해 마음이 토라지고 바라봐야 될 조건을 보지 못한다면 이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위치가 되었을 때는 어느 위치까지 가 있을까?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세상을 어떻게 훼파시킬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부모나 아이를 교육시킬 수 있는 사람이 계속 뒤를 따라다니면서 아이를 돌본다면 모르지만 아이가 자라서 학교에 가면 친구들을 통해 세상 문물을 받아들이고 세상의 조건을 통해 빗나갈 것은 뻔한 데 이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가는 것이 옳을까?

 

아이들이 세상에 나가서 바르게 인도 받는 자리에 놓이려면 그 아이를 돌보는 사랑의 손길이 따라다니지 않으면 아이는 살아남지 못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아이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게 마음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수고해봐야 아이들의 세대에서 이 사실이 바르게 전가되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다. 

이런 어리석은 일이 생기지 않게 아이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게 협력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마10:34~40)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바르게 깨달아서 세상을 정화시키는 일에 바르게 쓰임 받는 아이들로 자라가게 협력하고, 교육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부모의 몸을 거치지 않고도 우리를 세상에 내실 수 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우리를 직접 지으시지 않고 부모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내셨을까? 

사랑의 개념을 바르게 깨닫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이다. 

사랑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창조주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부모와 형제자매와 나 자신을 허락하신 것이다. 

 

지금은 부모의 몸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에 온 것처럼 보지만 근본 된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부모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못한다. 

부모의 몸을 통해서 우리를 태어나게 하신 것은 사랑 가운데 사랑을 기억하고, 사랑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사랑을 이루게 하시기 위한 사랑의 배려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져있는 이 매개체 자체에 한정되어 버리면 창조주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이 모호해져버린다. 

 

우리의 부모가 우리에게 생명을 준 것 같으면 부모를 통해서 내가 죽지 않아야 정석이다. 

하지만 부모 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왜 그럴까? 우리가 그 일을 이루는 근본이 아님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위치관을 바로 알아서 무엇 때문에 내가 세상에 왔는지 그 사실을 바르게 깨닫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내신 연유대로 우리를 쓰시기 위해 지금도 예비시키시고 지금도 이끌어 가신다. 

 

부모는 자기 속으로 낳았다는 그 조건 하나로 피땀 흘려 수고한 자기의 모든 노력을 자식에게 준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는 빈 몸으로 떠난다. 

하나님의 사랑의 일면모를 비춰주는 부모의 모습이다. 

그래서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2~3)고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주신 사랑의 배려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님을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이다. 

이 사실에 근본 된 것은 ‘몸은 비록 너의 부모를 통해 줄 수 있지만 그의 생명은 내가 정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해서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리는 일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우리의 삶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비록 지금은 내가 가정의 대표로서 예배에 앉아 있지만 언젠가는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나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접하고 사랑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언젠가는 다 같이 사랑 가운데서 하나로 예배드리는 그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하는 뜻에서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이루어지게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의 삶에 감사와 기쁨으로 화답하실 것이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들을 위해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함부로 단정 짓는 어리석은 자리에 놓이지 않아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사19:25)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나의 백성 애굽’이라는 호칭을 쓰면서까지 사랑을 보이신 그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삶에서 함부로 내 생각대로 단정 짓고 선을 긋는 일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이 같은 마음가짐과 생활, 조건을 갖추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세상에 보내시고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게 하시고 우리를 불러 모으신 그 목적이 어디 있는지 알게 하심에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자. 

내가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비록 지금은 나 혼자서 앉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이 나 혼자만의 일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서 떠나간 우리의 수많은 윗대 그분들에게도 똑같은 은혜를 베푸시고자 오늘의 나를 있게 하심에 먼저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하나님을 아는 일에 쓰임 받는 내가 있기까지 수많은 선대의 그 일도 기억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 그들의 모든 삶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쓰임 받게 하실 것이다. 

 

절에 나가든 도를 숭상하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똑같은 생명을 주셨기에 그들도 사랑하신다. 

“그들도 나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일에, 나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가시키는 일에 쓰임 받는 그들이 되게 하소서.” 

깨달은 내가 바로 서면 우리의 윗대는 나로 인해 그들도 바로 설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줄 안다.

이런 아름다움이 나로 인해서 바르게 안착되는 일에 쓰임 받는 모두가 되자. 

 

각자의 조건 안에서 우리를 택하셔서 예배의 자리에 앉게 하심에 그 사랑의 조건대로 쓰임 받는 모두가 되게, 나로 인해서 지나간 우리의 선대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그 일에, 하나님의 사랑을 접하는 그 일에 쓰임 받는 매개체 된 모두가 되자.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를 드리는 과정이다. 

예배를 드리고자 해서 옮겨오는 발걸음과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 

마음가짐 자체가 바르게 정립되지 못하면 예배를 드려봐야 소용이 없다. 

예배로 발걸음을 옮길 때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인도하셨을까” 그 사실을 바르게 깨닫고 전가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야 정상이다. 

 

또한 나의 예배도 중요하지만 나를 외롭게 두지 않으시려고 하와를 허락하셨고 하와를 통해서 후대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 영광 받으시고자 내 주위 형제를 허락하셨다. 

혼자서는 이루지 못할 것을 먼저 아시고 ‘우리’라는 조건을 통해 나를 일깨우신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사랑으로 하나 되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는 것이 정상이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은 예배를 드린다는 그 개념에서 끝내지만 예배드림의 주목적은 진정으로 사랑하겠다는 약속이다. 

사랑하겠다는 약속이고 사랑에 대한 감사이다.

이 사실을 바르게 이수하지 못한다면 다시 말하면 사랑하지 못한다면 예배는 드려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예배는 우리를 위해서지, 하나님을 위해서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라는 조건은 우리를 세상에 내신 그 뜻을 따라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심을 감사드리나이다. 나에게 이런 조건을 허락하심을 감사드리나이다. 나를 위해 허락하신 형제의 조건, 나를 위해 허락하신 세상의 조건을 감사드리나이다.” 

그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면서 예배를 드려야 정석이지 그렇지 못하면 그 예배는 잘못 드린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배를 드려도 우리의 마음과 생활 자체가 하나로 융화되지 못한다면 예배를 드려봐야 소용이 없다. 

 

“내가 깨닫게 된, 나를 깨닫게 하신 그 사랑의 조건이 나로서 그치지 않고 내 가정에도, 내 형제들에게도 주어져도 이 사랑의 조건이 싹이 트게 하소서. 나로 인해서 내 가정에, 내 형제들에게도 사랑이 싹트는 계기가 되게 하소서. 그 일에 쓰임 받는 씨알 된 나의 삶과 나의 예배가 되게 하소서.” 

여기서 시작하지 못한다면 예배는 허사가 된다. 이런 마음으로 드려질 때 정상적인 예배가 된다. 

 

내가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믿음의 씨알 된 조건에서 앉아 있는 것이다. 

믿음의 씨알 된 조건에서 앉아 있지 않는 것 같으면 내 예배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나 혼자 믿음의 싹으로서 앉아있지만 먼 훗날에는 나로 인해 우리 가정이, 내 형제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바로 알리는 일에 쓰임 받는 나와 우리 가정이 되게 하소서.” 

이처럼  예배를 드리는 주목적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그 연유를 바라보는 조건에까지 다다르지 못하면 예배는 허사가 된다. 

예배의 매개체를 바르게 이해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예배드림의 참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2010.03.07.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