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막10:23~27)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땅에서 그 조건이 같은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한 햇살 아래서 살아가지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에서도 사람의 위치관에 따라서 햇살을 받는 그 조건이 천양지차(天壤之差)다. 
좀 더 줄이면 한 집안에서도 마찬가지다.
한 부모 밑에서 자란 형제도 비슷하게 닮은 것 같지만 심지어 쌍둥이라도 그 성격과 행동, 좋아하는 기호품이 다르다. 
이러한 상황에도 사람은 내가 바라는 조건을 상대에게 요구한다. 
핏줄을 나눈 형제도 서로 다른데 심지어 태어난 곳도, 성격도, 모든 것이 다른 사람에게 내 생각을 주입하려 하고 내가 바라는 사실을 안착시키려고 한다. 
그 형제 또한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바라는 조건을 상대에게 요구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생각과 바램이 상대에게 전해지기를 바라고 자기의 바램대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이런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참 힘들다.
누군가 입은 양복이 멋져 보여서 “저도 똑같이 해주세요.” 하고 그와 똑같은 옷을 맞춰 입었는데 나는 멋져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 사람이 가진 체격과 얼굴 뉘앙스에 따라서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우리는 상대가 내 생각을 받아주기를 바라고 내 생각대로 되어 주기를 바란다. 
안 되면 위에 올라가 군림한다. 
군림한다 해도 형태는 비슷하게 만들지라도 그 속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배를 드린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사랑 안에서 창조주를 바라보는 우리의 모든 생각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램을 우리의 삶에서 실천하자’라는 뜻에서 모인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그 일에 입각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가 될까?” 그 사실을 자기 스스로가 궁구하고, 모두가 궁구해서 해답을 자신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바라시는 답에 우리 자신을 맞춰갈 때 모든 사실이 아름다워진다. 
이 사실을 찾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그 사랑 가운데 거하기 위해 예배의 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그 뜻이 무엇인지, 내 뜻에 맞추기보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에 맞출 수 있는 모두가 되게 마음을 드리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되자. 
멋진 한옥을 보고 사람들이 “참 보기 좋다”라고 한다. 
주춧돌이 하는 말이 “나는 밑에 깔려서 죽을 판이야”라고 말한다. 
주춧돌과 같은 사람이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집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위치관을 바로 알아서 “나는 이런 사람이 될 거야.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 왜냐하면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이곳을 꼭 지키고 싶어.”라고 스스로가 주춧돌이 되어 집을 지켜나갈 때 그 집이 건재하다. 
집이 오래되어 다른 것은 다 교체하더라도 주춧돌만은 바꾸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내게 주어진 조건에서 내가 무엇 때문에 세상에 왔고, 무엇 때문에 이런 모습으로 태어났으며, 자신의 성격이나 조건들을 돌아보고, 내가 무엇을 해야 될지 자신의 위치관을 찾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자기의 위치관을 찾는 것이 능력이고, 그 위치관을 찾을 수 있게 돕는 것이 사랑이다.
‘성공’은 자기 자신이 서야 될 자리를 바르게 찾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 자신을 찾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되자.
우리를 불러 모으신 것은 ‘나’라는 사람이 꼭 필요해서 불러 모으신 것이다. 
모든 매사 주어지는 조건들은 우리가 벌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범사를 통해서 우리를 키워 가시는 것이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이런 사실을 안다면 “왜 재수 없게 내게 이런 일이 닥칠까?” 하고 반문하기보다 나를 정화시키기 위한 사랑의 방편임을 인식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하게 되면 그러한 조건들이 나를 새롭게 하고,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그 일에까지 자랄 수 있는 조건으로 키워 가실 것이다. 
사는 날 동안 주어지는 모든 매사,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내 기분에 맞지 않더라도, 내가 바라는 이상에 맞지 않더라도 일단은 지켜보고 기다리면 때가 되면 나를 위한 사실임을 깨닫는 날이 온다. 
그러기에 범사에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참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하게 되면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연유대로 쓰임 받게 하시고, 언젠가는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고자 예비하신 그 길로 꼭 인도하신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의 조건을 잘 간직해서 무엇 때문에 나를 세상에 보내시고 무엇 때문에 이러한 조건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지 그 사실을 바르게 인식해서 감사함과 기쁨으로 살아드리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되자. 
‘사랑’이라는 매개체 가운데는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해’라는 조건도 있다.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엄마의 입장과 아이의 생각이 다를 때가 있다. 
아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기를 바라면서 고집을 부린다. 
좋은 일에만 고집을 부리면 좋은 데 옳지 않은 일에도 고집을 부리고, ‘고집을 부리면 다 된다’라는 생각이 인식되면 참 어렵다. 
그래서 아이를 키울 때 고집을 부리는 대로 다 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라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자구력을 키워줘야 한다. 
울더라도 일단은 자구력을 키워주는 것이 부모의 할 일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내가 울어도 안 되는구나!’ 하고 포기할 때까지 마음은 아프지만 조금 참아야 한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범사는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아시고 내 삶을 이끌어 가시는 사랑의 방편이다. 
‘나’라는 사람의 모습과 적성에 맞게 나를 키우시기 위한 사랑의 방편이다. 
또한 내가 바라는 조건과 상대가 바라는 조건이 대치(對峙)될 때가 있다. 
내가 봤던 사실과 상대가 봤던 사실이 다를 수 있다. 
오해는 어디서 벌어질까? 
나는 상대를 볼 수는 있어도 내가 나를 보지는 못한다. 
설령 거울을 통해 나를 본다고 해도 겉을 보지 내 속은 보지 못한다. 
하지만 상대는 내 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행동까지 다 보기에 내 행동을 통해서 내 속에 든 인성까지 읽고 있다. 
‘오해’는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때 벌어진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오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오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보듬는 것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이다.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단계를 넘으려면 할 수 없이 너도 마음이 아프고 나도 마음이 아프지만 참고 넘어가자.”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행동을 통해, 보듬음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모든 사실을 원상 복귀시키시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그 사실을 믿을 때 모든 사실을 회복시키시겠다고 하셨다. 
십자가 자체가 약속이다. 
예배는 예배를 통해서 한 주간에 있었던 모든 사실을 정화해서 원상 복귀시키기 위한 사랑의 방편으로 부르신 것이다. 
예배를 통해 버릴 것은 버리고, 갖출 것은 갖추어 내 주위 형제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보듬지 못했던 것을 보듬을 수 있는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오해했던 것을 원상 복귀시키고,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원상 복귀시키고, 이 한 날을 통해서 다가오는 일주일을 살아갈 때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했던 모든 사실을 원상 복귀시켜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사랑의 조건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참 믿음의 사람이다. 
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실 그 일을 꼭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고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며까지 사랑을 보이신 그 사랑이 우리의 사는 날 동안,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간섭하실 것이다.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내게 어려움과 괴로움을 당하게 하신다면, 내 후대들에게 더 좋은 것을 이양시키기 위해 내게 그 사실을 주심에 감사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내가 잘되고 편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 후대가 잘 되는 것이 더 아름답다. 
이 사실을 바르게 이양시키기 위해 지금도 훈련하시고 이끌어 가신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사랑’과 ‘오해’를 바르게 이해하는 참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 각자의 바램을 절대로 소실시키지 않으신다. 
우리를 고생시켜서라도 우리의 바램을 이수시키시기 위해 오늘도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그러기에 절대 두려워하지 말고 매사에 감사함으로 화답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이같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연유대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대로 우리를 사용하시고자 범사를 통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실 때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처음과 끝을 아시고 허락하신 범사를 통해 우리를 키워 가신다.
‘범사를 인정하라’는 말은 우리의 모든 사실을 아시고 세상에 보내셨기에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순종하고 따라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고 감사의 조건으로 이끄신다는 말이다.
물질만 있으면 나와 내 후대가 일평생 걱정하지 않고 살 것 같지만 물질이 있으면 어려움이 더 많이 닥치는 것을 보게 된다. 
물질을 허락하심은 물질을 통해서 우리네 사람이 해야 될 일을 찾아가게 하시기 위해 주시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통해서 자신이 그 위에 올라서서 그 사실을 자랑하려고 하면 다음 대에서나 자기가 눈을 감기 전에 그 사실을 통해 후회하는 나를 보게 된다. 
물질을 맡기심은 물질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길을 허락하시기 위해 주시는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이끌어가게 해야 하는데, 물질 위에 내가 군림하기에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고 물질을 다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물질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일에, ‘나’라는 존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일에 바르게 쓰임 받는 물질이 된다면 물질이 많으면 많은 만큼 좋다. 
이렇게 아름답게 쓰이고 활용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2010.05.30.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