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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83.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라

  • 등록일 : 2026년 4월 24일
  • 조회수 : 130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3:5~6)


사람이 제일 하기 쉬운 게 뭘까? (훈수 두기, 흉보기)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 훈수를 두거나 다른 사람을 흉보는 것이다. 
훈수는 따귀를 맞아가면서 둔다고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이 아파서 죽을 판이라도 다른 사람을 흉보고 훈수를 두는 것은 한다. 
숨이 넘어가면서도 다른 사람의 고쳐야 할 점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하면 안 된다. 훈수를 두거나 흉을 보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이 정말 밉다면 방법이 하나 있다. 
미운 그 사람에게 마음을 쓰고 전화나 소식을 계속 띄워라. 
그러면 미움의 대상 자체가 내게 다가오지 못한다. 
누군가가 정말 밉거든 자기에게 그 일이 다가오지 않게 방비하는 것이 지혜롭다.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일이 그에게 가지,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을 ‘사랑’이라 하고 지혜롭다고 한다. 
사랑하는 것은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는 지혜롭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미우면 고개를 돌리고 외면한다. 

상대방이 정말 밉거든 미운 만큼 통로를 열어 놓아라. 
그가 다가와 마음을 열면 다행이지만, 마음을 열지 않으면 그 길로 끝난다. 
그가 받든, 받지 않든 줄 수 있는 만큼 줘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며까지 우리를 이끌어 오셨다. 
이것이 진짜 사랑이다. 
사람으로서의 사랑은 그냥 계속 줘라. 인간적으로 주게 되면 결국 그 사람은 멀어진다. 
나중에는 부끄러워서 못 돌아온다. 정말 밉다면 그렇게 해라. 

밉다고 흉을 보고 해악질을 해서는 안 된다. 
결국은 그 해악질이 다 자기에게 돌아온다. 
얼마나 지혜롭지 못한가? 
지혜로운 사람은 그냥 줘버린다. 
그가 어떻게 하든 그냥 줘버린다. 
그러면 원망도 하지 못하고 해악질도 하지 못하고 끝난다. 
자기에게 퍼주는데 누구를 원망하겠나? 
줘버리면 그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한다. 
언뜻 생각하면 바보 같지만, 이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단절하고 고개를 돌리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다. 
인간적인 사랑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랑은 그냥 주는 것이다. 
그가 밉거든, 보기 싫거든 그냥 계속 줘라. 
주고 나면 원망하지 못하고 떠내려간다. 
다음에 내가 그를 찾으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참믿음의 사람은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정말 밉다면 이 방법을 쓰고 난 뒤에 그를 위해 기도해라.
“나는 이 일을 감당할 만큼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에 함께하셔서 사랑으로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퍼줘라. 
그러면 미워할 것도, 손해 볼 것도 없다. 
사랑한다는 것은 우선은 내게 해가 되고 내 마음이 아프더라도 내게 그런 인연을 맺게 하신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서 내게 그 사실을 맡기셨기에, 내가 할 일은 비록 마음에 안 들고, 짜증이 나고, 별 소득이 없어도 그로 인해서 먼 훗날 이루실 일이 있어서 만남을 주셨기에 내가 먼저 감사를 잃지 않고 하나님께 그 사실을 맡길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가자. 
하게 되면 우리의 모든 사실을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라는 사람에게 맡기신 그 위치가 어디인지, 내가 서야 될 위치가 어디인지 그 자리에서 내 삶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을 ‘지혜’라고 한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나를 세상에 있게 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분량이 무엇인지, 나에게 맡기신 위치가 어디인지 나 자신을 알고, 내 위치를 바로 알아야 한다. 
삶에서 ‘나’라는 사람의 존재 가치를 얼마만큼 잘 파악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
‘내가 어떻게 삶을 살아서 나를 내신 뜻대로 쓰임 받을까?’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해답은 금방 나온다. 
삶에서 ‘나’라는 사람의 가치관을 어떻게 하면 바르게 지키고 이수해서, 인간적으로는 나를 세상에 있게 한 부모에게, 내 주위 형제들에게, 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 삶의 가치관을 통해서 그들에게 감사와 기쁨이 주어지게 할까? 에서 시작해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조건에 휘말려서 자신을 내던지지 않는다. 
내 주위 모든 조건이 나를 따라오게 만들지, 자기 조건을 거기 맡겨서 허우적대지 않는다. 
지혜롭게 살고 싶거든 ‘나’라는 존재를 통해 내 주위 모든 조건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비록 작은 것이라도 내 삶에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자. 
하지만 사람들은 큰 것만 좋은 줄 알고 넓은 것만 좋은 줄 안다. 
작은 것이 좋은 줄을 모른다. 
어떤 조건에서 성공하고 싶거든 내가 있는 최소 단위에서부터 쓰임 받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가자. 
작은 데 쓰임 받으면 큰 것에는 자연히 쓰임 받는다. 
애를 쓰지 않아도 저절로 이끌림을 받아 가게 된다. 
큰 것에 쓰임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바람에 일평생을 투자하고도 결국은 쓰임 받지 못한다. 
사는 날 동안 내 주위 모든 사람에게 이득을 끼침을 통해 그들의 입술에서 감사가 주어질 때 내게도 감사와 기쁨이 주어진다. 

또 누구 위에 군림하기보다 도와버리면 그 자리는 내 자리가 된다. 
이런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 우리를 세상에 내신 뜻대로 쓰임 받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나를 세상에 보내심을 감사드립니다.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우리를 사랑하심을 바르게 드러내는 일에 쓰임 받는 내가 되게 하소서”하는 바램이 끊이지 않는 모두가 되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은 어느 때나 근본 된 그 상황 자체는 똑같지만 매년 똑같은 계절이라도 그 느낌이 다르듯이 우리 앞을 스쳐 가는 범사도 바뀌어 감을 기억해야 한다. 
똑같은 계절이고 날짜는 비슷해도 우리 앞을 스쳐 가는 조건들은 다 다르다. 
그래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하셨다. 
바람이 불 때 어디로 갈지 모른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바람이 일어나 불듯이 우리의 범사 또한 하나님께서 각자의 바램을 이수하시기 위해 범사를 통해 키워가시기에 어느 길로 우리를 이끌어 가실지 모른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 

전체의 바램 즉 우리의 바램과 나의 바램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전체의 조건에 차질 없이 각자의 바램을 이수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사실을 이끌어 가시기에 “너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라고 말씀하신다. 
모두에게 감사가 되게 우리의 모든 생활을 이끌어 가신다. 
지금 당장 나는 급해서 죽겠고, 답답해서 죽겠다고 하지만 내가 아무리 해도 우리의 바램이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나의 바램을 얹으면 깨져버린다. 
나의 바램으로서는 이 일이 금방 되기를 바라지만 전체의 바램 즉 우리의 바램이 나의 바램이 되게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심에 조금만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간다면 모두가 감사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개인의 바램에만 치우쳐서 허우적대다 보면 결국은 자기의 위치관을 잃어버린다. 
전체의 바램을 위해 조금만 기다려주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램과 나의 바램이 맞닥뜨려질 때 모든 것이 감사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기에 내 개인의 바램에만 치중해서 그 일을 주장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램에 나 자신을 맞추어가는 믿음의 사람,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간다면, 내 모든 사실을 먼저 아시기에 내 삶이 지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다가오실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람하심을 믿는 사람으로 자라가야 한다. 
부모는 우리를 세상에 있게 하는 하나의 매개체다. 
비록 부모의 몸을 통해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지만,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로 부모의 몸을 빌린 것이다. 
근본 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부모의 몸을 통해 우리를 태어나게 하셨기에 자기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기에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직전에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하시며 자기의 삶을 마치셨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생명을 통해 우리에게 구속사를 여신 것이다. 
이 사실을 믿는 자에게 새 생명이 주어지게 하시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초개(草芥)같이 십자가 위에서 버리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접합시키신 것이다.

내가 물질 때문에, 병 때문에, 자식 때문에, 내 개인의 조건 때문에 설령 그렇게 믿음의 밑판이 시작되었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던 그 사실을 통해 어떠한 조건이 있어도 믿음의 밑판이 흔들리지 않게 만들어줘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 이 위에 어떠한 것을 얹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 조건이 흔들리면 믿음도 흔들리게 된다. 
한 번 믿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기에 그를 이끌어내시고자 또다시 어려움을 허락하신다. 
그러기에 설령 내가 어떤 조건에 의해서 믿음의 밑판을 닦았어도 살아가는 동안에 새로이 정립해야 한다. 
비록 이 사실에서 나를 부르셨지만, 비록 이 사실에서 내가 이끌림을 받았지만 이제 내가 이것 때문에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기에 믿음의 삶을 산다. 
다시 말하면 믿음의 밑판을 굳건하게 해놓았을 때 우리의 사실이 흔들리지 않는다. 
이런 참믿음의 삶에 도입하는 모두가 되자.                                             

(2010.08.22.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