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16:1~9)
사람이 살아서 숨을 쉰다는 것 자체가 귀한 것이다. 
살아있을 때 그 사실의 귀중함을 바르게 정립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떠날 때 “나를 데려가심을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 즉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떠한 것도 그의 앞을 가로막지 못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이 바룰 것은 바루고,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자신을 돌아봐서 그 삶을 정비하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아직도 내가 깨달을 기회, 감사할 기회, 나를 사용하실 기회가 있기에 내 삶에서 이러한 조건을 허락하심에 감사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나에게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그 조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나를 세상에 있게 한 근본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인생 조건을 함부로 망가뜨리지 않는다. 
내게 육을 허락하신 부모님과 내게 영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내 삶을 지켜보신다면 ‘과연 내가 이렇게 해서 될까?’ 자신을 점검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가기를 바란다. 
자기의 몸이나 생각을 망가뜨리는 조건은 정비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멈출 수 없으면 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생각에는 ‘이래도 괜찮겠지?’ 한다. 괜찮을 수는 있다. 
하지만 어느 시기가 되고 나면 자신을 잃어버린다. 
다음부터는 사람의 본성 자체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제2의 본색이 드러나서 그 일을 망가뜨린다. 
자신을 망가뜨리는 일에 도달하지 않도록 자신을 가누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성경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지혜로워서 자기 자식에게 우환이 생길까 싶어 살아있는 동안 자식들을 잘 교육시켜서, 사는 날 동안 즐겁게 보람되게 사는 자식이 되라고 항상 하나님께 자식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1:8) 하였더니 사단이 하는 말이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그가 가진 것을 다 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1:11)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욥1:12) 하시고 사단이 욥을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누구에게나 이 일이 도래한다. 
욥이 제사를 드린 주목적은 자식들에게 우환이 닥치지 않게 사전에 방비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 
자식들에게 잘못된 조건이 닥치지 말라고 제사를 드린 것이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주관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어려움이 닥치지 않게 사전에 방비하는 데 그친 것이다. 
즉 방법을 쓴 것이다. 
오늘날 부모들이 내 자식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지 말라고 방비하는 것은 참 위험하다. 
시작은 비슷한 것 같은데 근본적으로 다르다.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기보다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자식으로 키워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아이로 자라야 하는데 아이들이 사는 동안 잘못된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제사를 드린 것이다. 
이것을 사단이 알고 “욥이 가진 것을 다 치시면 하나님을 배신할 것”이라고 고발한 것이다. 
자기에게 생명을 허락하시고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초점을 둬야 하는데, 어려움이 닥치지 않는 데 초점을 두고 제사를 드린 것은 하나님을 농락하는 것밖에 안 된다. 
결국 사단이 그 일을 알고 고했던 것이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사업에 성공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사업을 맡기셨다’가 되어야 한다. 
‘무엇 때문에 내게 사업을 하게 하셨나?’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사업에 성공하는데 초점을 두기에 일이 안 풀리는 것이다.
내가 사업에 성공하는 것보다 ‘내게 사업을 맡기셨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시고자 내게 사업을 맡기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면 모든 일이 쉽게 풀린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에 쓰임 받는 내가 된다면 재물이 오고 안 오고, 성공하고 안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사와 기쁨을 허락하시기 위해 주시는 선물이 그것일 뿐이다. 
욥이 마지막에 이 사실의 근본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재산과 그의 자식들이 배가 되는 조건을 허락하셔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그의 생애를 통해 드러내셨다. 
사는 날 동안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세상의 구역에서 나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리는 일에 쓰임 받는 내가 되게 하소서” 하는 데서 시작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실을 책임지고 이끌어 가실 것이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16:3) 
사람이 이 땅에 와서 생활하는 동안 경영하고 경영하지 않고 그 일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첫 사람 아담이 세상에 와서 준비도, 경영도, 수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실을 책임지시고 그를 위해 모든 조건을 허락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짓는 바람에 쫓겨나는 어려움을 통해, 다시 말하면 사람이 되게 하는 일에 쓰임 받게 하시고자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배려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까지도 우리에게 맡겨서 일을 시키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반기시지 않는다. 
사람이 스스로가 어려움을 자초해서 어려움을 통해 승화시키고자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배려일 뿐이지 하나님께서 일을 시킨 것이 아니다. 
경영하지 않고는, 수고하지 않고는 우리 입술에 떠넣을 것이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는 천국이라는 자체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내가 수고하지 않으면,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으면 이곳에서는 살 수 없음을 알게 하신다. 
한세상 사는 날 동안 사람이 수고해야 하는 것, 이마에 땀을 흘려야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좀 더 애를 먹고 싶으면 말씀대로 안 살고 삐딱하게 나가면 애를 먹게 된다.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스스로가 그 일을 자초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가는 모두가 되자. 
이곳은 유배지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와서 삶을 살게 하신 연유는 ‘나’라는 사람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해, ‘나’라는 사람을 정화시키기 위해 보내신 곳이 이곳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이곳에서 천국을 찾는 정신없는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정화시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보내신 이곳을 잘 건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는 일에 쓰임 받는 모두가 되자. 
그래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6:4~9)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엉뚱한 짓을 할까 봐 이렇게 세밀하게 구분하신다.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집안에서 생활할 때나 어느 때나 다시 말하면 네가 이곳에 사는 것이 너를 승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라는 것을 알고 항상 그 일을 의식하고 사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라는 데서 주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이 사실을 안다면 오늘날 우리가 믿음의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승화시키기 위한 사랑의 배려이다. 
그러기에 이곳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다.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리는 일에 쓰임 받는 전진기지와 같은 나 자신이 되게 하소서. 우리가 되게 하소서. 이곳이 되게 하소서.” 이것이 근본적인 신앙의 개념으로 자리매김해야 아름답다.
이런 사실이 바르게 자리매김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고 함께 하셔서 살아계심을 나타내실 것이다. 
자기 비하나 자기 비관이나 자기 조건에 치우쳐서 허락하신 구역을 나 스스로가 훼파하는 어리석은 자리에 놓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근본적으로 나를 위해 허락하신 내 주위 형제를 나 스스로가 지키고 보호할 때 나의 자유와 내게 주어질 복록들이 보호받음을 알게 하신다. 
그래서 “사랑하라” 하셨다. 
“사랑하라” 하신 것도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 사실을 마음에 꼭 새겨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루어 드리는 일에 쓰임 받는 모두가 되자.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도 결함이 없기를 바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뜻이다. 
나쁜 짓을 한다고 지옥에 다 보냈으면 세상이 벌써 끝났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생명을 우리에게 부여하셨기에 단 한 사람도 결함이 생기지 않게 하시기 위해 오늘날까지 우리의 삶을 이끌어 오신 것이다. 
이왕이면 감사와 기쁨을 통해 영광 돌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저 사람은 지옥 가야 해.” 이런 말을 입술로 내뱉기보다 “나의 삶을 통해 그도 구원의 대열에 들어설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내 삶의 조건이 그에게까지 전가되게 하소서”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내 삶의 일부를 잘라서라도 그의 삶에 생명이 주어진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가자. 
예수님께서 자기의 생명을 드려 땅 위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심과 같이 사는 날 동안 나 한 사람의 조건으로 이같이 쓰임 받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꼭 역사하실 것이다. 
믿음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바르게 알리는 일에 쓰임 받는 모두가 되자. 
(2010.09.12.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