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13:18~23)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믿지 못하는 바람에 신앙의 길이 삐딱하게 가버렸다. 
말세에는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마10:21, 막13:12)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사랑이 넘쳐나야 하는데, 부모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고 자식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셨다. 
믿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랑이 더 넘쳐나야 하는데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가 버렸다. 
근본적인 믿음의 상태가 바르게 정립되지 못한 데서 시작된 것이다. 
백 년 전, 천 년 전보다 믿는 사람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옛날이 더 안정되었다. 
믿는 사람이 많은 만큼 세상이 더 안정되고 더 아름다워야 하는데, 갈수록 세상이 더 악해진다. 
이런 사태가 왜 벌어질까? 
신앙의 근본 된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데서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 핏줄이 이어진 형제끼리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인데 이 사실의 근본을 보지 않고 상태만 본다. 
사람이 어디서 왔고 죽으면 어디로 갈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누구냐고 물으면 부모라고 한다. 
그 물음을 계속해서 하게 되면 그 끝이 어디일까? 
결국은 사람을 창조하신 그분께로 그 사실이 가야 정상이다. 
내가 살아있다는 자체, 내 생명의 근원 자체가 창조의 조건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만 생각하지, 사람의 근본 된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10:3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흥선대원군 당시에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 ‘상놈의 종교’라고 해서 박해했다. 
사실은 그게 아닌데 이 사실을 오인한 데서 시작해서 삐딱하게 가 버린 것이다. 
말세에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죽는 데 내놓는 것, 믿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진 만큼 사랑이 더 넘쳐야 하는데 이런 사태가 된 것은, 결국은 창조주를 바라보지 않고, 사람의 근본 된 사실을 바라보지 않고 현재의 자기 조건만 바라보는 바람에 결국은 자기의 부모와 자식을 죽는데 내놓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준 것, “네가 네 짝을 사랑하느냐? 네 속으로 낳은 자식을 사랑하느냐? 네 부모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너를 있게 하고, 그 조건을 있게 한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냐?”라고 묻는 것이다. 
이 사실을 성경에서 계속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기에 네가 망해야 마땅하지 않냐?”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짐승도 한다. 
사람이 사람을 향해서 사랑하지 못하는 것, 근본적으로 이 사실을 고치지 못하면 결단코 망해야 정석이라는 말이다. 
자기 속으로 낳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사실의 근본 된, 위로 올라간다면 내 주위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망해야 마땅하다는 말이다. 
이 사실을 성경에서 계속해서 역설한다. 
성경은 어떠한 잘못이 있더라도 일단은 그를 감싸고 그가 사랑으로 돌아오게, 내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께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참 믿는 사람, 참 깨달은 사람의 할 일이라고 말씀하시며, 그것을 하지 않는 자는 어려움을 당해야 마땅하지 않느냐고 역설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죄다. 
자기 속으로 낳은 자식, 자기를 낳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나?
“네가 너를 낳은 네 부모와 네가 낳은 자식을 사랑하느냐? 그러면 이 사실의 근본 된 나를 기억하느냐?”라고 물으신다. 
이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때 근본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22:37~38)라고 하신 것이다. 
근본 된 신앙의 이 사실이 정립되지 않고는 사람이 사는 이 세상에서 평안과 행복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핏줄을 나눈 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으냐? 그 일을 통해 네 주위 형제를 사랑하느냐? 
다시 말하면 네게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네게 허락하신 네 주위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으냐고 말씀하신다. 
성경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이것을 역설한다. 
마지막 날에는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죽는 데 내놓는다는 말은 현세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일에 동참하지 않는 모두가 되자. 
주일이면 사람들이 교회에 모인다. 
신앙의 근본 된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기는 본다. 
하지만 내 가정을 위해, 내 자식을 위해 바라본다. 
성경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한다. 
자기 조건에서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네가 네 자식을 사랑하느냐? 네 부모를 사랑하느냐? 사랑한다면 이 사실의 근본 된, 이 일을 있게 한 창조주를 기억하지 못할 때 그 무엇보다 악하다고 하신다. 
그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하면서도 실제로 그 일에 들어가면 다 돌아서 버린다. 
우리가 짝을 이루는 이유는 근본 된 창조주의 그 사랑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그 조건을 허락하신 것이다. 
그 속으로 자식이 태어나게 만든 것도 이 일의 근본 된 창조주를 기억하게 하려고 자식을 낳게 하신 것이다. 
“네가 네 부모, 네 자식을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이 사실의 근본 된 창조주를 바라보는 네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신다. 
이게 되어야 근본적인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할 일이다. 
우리가 죽을 때 내 속으로 낳은 자식과 후손들이 나로 인해서 창조주를 바라볼 수 있게 되어 “비록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먼저 가시지만, 우리에게 이런 조건을 허락하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라고 그 사실 때문에 자녀들과 후손들이 둘러서야 정석인데, “우리에게 재산을 뭘 남겼나? 이걸 어떻게 나눌까?”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자식들의 모습이다. 
이런 잘못된 양상들이 벌어지지 않게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온전히 삶을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믿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이 땅에 천국이 와야 하는데 우리가 추구했던 천국의 모형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우리 앞에 다가오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우리에게 짝을 허락하시고, 자식을 허락하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네가 네 짝과 네 자식을 사랑하느냐? 너를 낳은 부모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이 사실의 근본 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네 할 일이 아니냐?”라고 하시는 것이다. 
내 짝과 내 속으로 낳은 자식, 나를 낳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성경은 여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왜 허락했나를 우리에게 질문하신다. 
이 질문에 대답할 사람이 없다. 
그래서 악하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에게 짝을 허락하고, 자식을 허락하고, 가정을 허락한 것은 사랑의 근본 된 나를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허락했는데 너희는 그 일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래서 악하다고 하는 것이다.
믿는 사람은 많지만, 뭘 믿느냐? 
자신을 믿는다. 내가 행복하고 잘 되기 위해서 믿는다. 
다시 말하면 그 일을 허락한 창조주를 바라보지 않는다. 
성경은 네가 잘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너를 있게 한 창조주를 바라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으냐고 하는 데, 사람들은 그것을 돌아보지 않는다. 
명절이 되면 나를 낳아 주고 길러 준, 나를 사랑했던 그 가정을 찾아가는 것이 명절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럼, 이 아름다운 모습을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주셨나? 
내게 생명을 주신 분을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아담과 하와까지 간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의 생명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명절을 통해서 이 사실을 재인식하고, 재인식한 이 사실을 우리의 삶에 담아서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신 창조주를 찾아가지 않으면 이 명절의 의미와 조건은 다 무의미하다.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모인 것은 “내게 생명을 허락하시고 사랑하는 가족과 부모를 허락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창조주를 바라보라는 뜻에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 하시며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신 것이다. 
사랑의 근본 된 그 사실을 바라보게 하려고 우리를 예배의 자리에 모으신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것 같으면 근본 된 사실을 바루는 데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성경에서는 인류의 시조를 누가 만들었는지 묻는다. 
창조한 이가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성경을 주신 것은 이 사실을 믿으라고 주신 것이다. 
이 사실을 믿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이 사실을 알면 내게 생명을 허락하신 창조주의 그 뜻대로 쓰임 받는 것이 참 믿는 사람의 할 일이다. 
말씀이 말씀이 되게,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에 게으르지 않은 우리가 되게, 전하는 우리 자신부터 이 사실을 바르게 정립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2010.09.19.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