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3~16)
우리 생각에는 각자의 바램대로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당연하다. 
배고플 때 식욕을 느끼고, 이성적인 조건을 통해 자기의 바램을 그려나가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우리 앞을 스쳐 가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날들이 하루하루 감소해 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극소수다. 
사람뿐 아니라 모든 만물이 다 똑같다. 
배고프면 식욕을 느끼고 때가 되면 자기의 삶에서 후대를 키우고자 한다. 
그중에 유독 사람만이 이러한 사실에서 벗어나 영원에 관한 삶을 추구한다. 
다른 만물들은 단 하나도 영원에 관해 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이 귀하다고 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어떻게 생겼든지 그 속에 심긴 영의 세계가 있고,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이끄시기에 그래서 사람이 귀하다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귀하고 훌륭한 말이라도 거지 아이 하나보다 그 가치가 미약하다.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자기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끌어 올릴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가자. 
사람에게만 주어진 이 특성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고, 이 사실을 가벼이 여기는 바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삶에 대한 조건을 부여하고 싶어도 그 사실에 아무런 개념을 두지 않기에 그에게 어려움과 괴로움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영원에 관한 삶의 추구를 스스로가 하게 하고자 어려움을 허락해야 정석인 것이다. 
우리가 짐승을 키울 때 내게 속한 그 짐승이 아프면 사랑하기에 바램을 걸고 소생시키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이 주인이 하는 일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비록 내가 가진 것이 없고, 갖춰진 것도 없고, 나를 둘러싼 주위 사람들이 나를 귀하게 보지 않아도 내게 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내 생을 통해 이루실 일이 있음에 나를 세상에 보내심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생명에 대한 가치관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참사람의 할 일이다. 
그래서 자살을 그 무엇보다 잘못한 것으로 지적한다. 
자기 생명이 자기 것이 아니라 그에게 생명을 부여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로 인해서 이루실 일을 계획하시고 세상에 보냈는데 그 사실을 본인 스스로가 폐쇄할 때 ‘죄’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갖춘 것도 없고, 인물도 변변치 않은데” 그것은 본인의 생각이다. 
사람의 신체 중에서 가장 말단에 있는 것이 발바닥이다. 
하지만 내가 가고자 할 때는 발바닥이 그 무엇보다 필요하다. 
발바닥에 어려움이 생기면 몸 전체가 지장을 받기에 양말과 신발을 신는 것이다. 
언뜻 보면 그 무엇보다 볼품없이 보이는 발바닥이지만 우리의 몸을 이끌고 다니기에 그 무엇보다 중요한 자리이다. 
사람은 몸은 복합체다. 
그렇다면 내 주위 형제들 즉 모든 조건 자체가 나를 위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13:8)라고 하는 것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내 주위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라는 말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이런 사실을 안다면 내 삶에 여유가 있다면 이들을 보듬어가는 것이 참 믿는 사람이 해야 할 올바른 일이다. 
이 같은 믿음의 삶을 통해 나로 인해 내 주위를 건사해 나가고, 나로 인해 내 주위를 불러일으키는 다시 말하면 새 삶을 살게 이끌어가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사람이 살아있다는 자체가 각자의 삶에서 해야 할 일을 마무리 짓지 못했기에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 
각자의 삶에서 자기의 할 일을 마무리 짓게 되면 그 사람의 생명은 떠나게 된다. 
내게 생명이 있다는 것은 내 삶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에 생명을 거두어 가시지 않은 것이다. 
이왕이면 고생을 적게 하고, 내가 좋아서, 기뻐서 스스로가 자원해서 내 삶을 추구하는 것이 지혜롭다. 
말이나 소를 끌고 갈 때도 주인의 바램대로 가지 않을 때는 매질을 해서라도 끌고 간다. 
우리의 삶에서 창조주가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이같이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나’라는 사람의 존재 가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이 있어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는데 이 삶을 바르게 이수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이끌어 가시기 위해 “이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왔다. 이들이 하듯이 너도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권하는 것이 성경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심성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심성이 이것보다 더 중요하다. 
누가 가자고 해서 가고, 누가 오라고 해서 올 때가 좋은 것이다. 
어느 시기가 되면 가자고 할 사람도, 오라고 할 사람도 없다. 
자기 스스로가 가야 될 때, 스스로가 와야 할 때가 온다. 
그때부터는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기에 힘이 든다. 
가자고 할 때 고집부리지 않고 가고, 오라고 할 때 고집부리지 않고 오는 사람이 되자. 
어린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때 학교에 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온갖 방법을 써서 학교에 보낸다. 
하지만 다 크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느 시기가 되면 이런 사실이 끊어진다. 
그때부터는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한다.
그러기에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그 무엇보다 귀하다. 
아무리 괴롭고 답답해도, 시한부로 투병하는 사람도 그의 할 일이 있다. 
그의 조건을 통해 후손들이 해야 할 일, 그의 삶을 통해 그가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서 먼저 아시고 그에게 조건을 맡기시고 생명을 붙여 놓으신 것이다. 
그러기에 살아있다는 자체가 그 무엇보다 귀함을 기억하는 모두가 되자. 
하게 되면 어느 시기가 되면 하나님께서 ‘나’라는 존재를 통해서 이루실 일을 우리 앞에 대두시키시고, ‘나’라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실 그 일을 우리 앞에 제시하실 것이다. 
“이제는 가야지. 이제는 해야지”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이런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갈 때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그 임무를 이수할 수 있는 조건을 우리 앞에 제시하신다. 
어떤 때는 물질로, 어떤 때는 조건으로 우리 앞에 대두시키시고 우리의 삶을 이수하게 하신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선 내 앞에 주어진 세상적인 조건에만 치우쳐서 허우적댄다. 
하나님께서 내 앞을 막으실 때는 “그건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네가 해야 할 일은 그것보다 먼저 너 자신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이렇게 말씀하는데도 사람들은 그 일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부모가 아이를 키울 때 몸을 씻기기도 하고 옷을 갈아입히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가 안 한다고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우면 혼이 나면서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마지막에는 엄마가 주는 간식으로 울음을 그치게 된다. 
아이가 엄마에게 혼이 나면서 하는 이 과정이 인간적으로는 고생이요, 고난인 것이다.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은 “엄마가 하자는 대로 해주면 엄마가 맛있는 것도 주고 다 할 텐데 왜 저렇게 고집을 피울까?”라고 하지만 아이뿐 아니라 어른인 우리도 똑같이 행동한다. 
하나님께서 “아직은 때가 아니다. 지금은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라고 하시는데도 자기의 바램만 추구하고 제시한다. 
그러기에 스스로가 없는 어려움을 자초하는 것이다. 
이런 어리석은 일이 주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이 일을 추구하는데 일이 빨리 안 풀려요.” 그 일이 빨리 풀리면 그 사람은 죽는 것이다. 
그 일보다 먼저 자기가 해야 될 일을 하나님께서 남겨놓고 그 사람만이 해야 할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 지체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그 일을 제외한다. 
제외하기에 결국은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다. 
고생을 사서 한다는 말은 자기가 먼저 해야 할 일을 앞세워야 할 텐데, 먼저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어 놓고 나중에 해야 할 일을 끄집어 당길 때 없는 어려움을 부르게 된다. 
사서 고생하지 않고, 없는 어려움을 자초하지 않으려면 범사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실 때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우리의 범사를 통해서 운용하시는 그 사랑에 감사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그래서 “너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라고 성경은 말씀하신다.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역사하시고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꼭 나타내실 것이다. 
이런 사실을 우리의 눈으로 보고 우리의 생활로 겪으면서도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버리지 못해서 어려움을 자초한다. 
이제는 이런 사실에서 벗어나서 참사람 된 가치관에 우리의 삶을 살아드리는 모두가 되자.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다음에는 나를 발바닥처럼 사용하시든지, 손바닥처럼 사용하시든지, 눈처럼 사용하시든지, 입처럼 사용하시든지 그 일은 창조주께서 하실 일이고 우리의 할 일은 내게 맡겨진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면서 “나도 입처럼 매일 먹고 싶은데”라고 한다. 
하나 물어보자. 입이 편할까? 발바닥이 편할까? 
둘 중에 어느 것을 할래? 라고 물으면 모두가 입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먹는 것이 입으로 들어가긴 하지만, 입과는 상관이 없다. 
입으로 들어간다는 그것밖에 없지, 그 외에는 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지체마다 자기가 맡은 소임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살아있는 동안 각자에게 맡겨진 소임을 다할 수 있는 내가 되게 도와주세요.” 이처럼 창조주를 향해 바램을 걸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부모들 생각에는 ‘내 자식이 공부를 많이 하고 성공하면 편하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교수가 되어도, 대통령이 되어도, 설령 왕자라도 자기의 생을 스스로 마감하기도 하고 사고를 당해 죽기도 한다. 
어차피 사람은 죽는다. 
그러기에 살아있는 동안 나에게 맡겨진 소임을 다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리매김하자. 
하나님께서는 살아있는 동안에 나만이 해야 할 일을 아시고 나를 세상에 보내셨다. 
그 일을 마치기 전까지는 우리의 생명을 붙여 놓으신다. 
그러기에 살아있다는 자체가 그 무엇보다 귀함을 기억하자. 
(마5:13~16) 이 말씀은 누누이 듣는 말씀이고 너무나 가까운 말씀임에도 우리네 사람은 어디까지나 내 조건에서, 내 유익과 필요성에서 시작하기에 이 말씀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 싶어서, 말씀을 보기는 보고 듣기는 들어도 우리의 생활과는 상관없는 말씀으로 돌려놓는다. 
하지만, 이 말씀은 우리네 사람의 기초가 되는 말씀이다. 
일생을 사는 동안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살려놓은 것이다. 
이 말씀이 필요가 없다고 할 때, 스스로가 이 사실을 제외할 때 악하다고 한다. 
스스로가 이 사실을 무관하게 제쳐두고 나갈 때 그에게 어려움과 괴로움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어렵다, 괴롭다고 할 때 이 말씀을 돌아보면 “아하,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시겠구나!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겠구나!”라고 다시 한번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아름다운 말씀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마5:13) 
‘너희’라는 말은 이 말씀을 듣고, 보는 모두를 향해 하는 말씀이다. 
이 말의 근원은 네게 임무를 맡기고 세계관을 줬는데 너 스스로 이 사실을 폐쇄해 버리고, 네 갈 길을 간다면 내가 너를 도울 수 있겠느냐? 할 수 없어서 네가 그 자리로 들어갈 수 있게 어려움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해서 나에게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루어 드리는 일에 쓰임 받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5:14)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와서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내가 숨어서 다른 짓을 하려고 해도 숨지 못한다는 말이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듯이 숨길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춰야 정상이지 않겠느냐?” 해서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고 말씀하신다. 
믿는 사람의 참 본분, 사람 된 본분을 알게 하는 지침이 되고 기초가 되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가 어려움과 괴로움, 답답함에 처했을 때 이 말씀을 상기하면서 다시 한번 더 재기할 수 있는,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말씀이다. 
나라는 존재를 통해 이루실 일을 허락하시고 나에게 다시 한번 더 새 힘을 더하심, 기회를 허락하심 감사드립니다.”라고 할 수 있는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하게 되면 사는 날 동안 우리의 바램을 이수할 기회를 허락받게 된다. 
그러기에 자기의 바램을 먼저 제시하기보다 먼저 그 바램을 이수할 수 있는 조건을 부여받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옛날부터 어른들이 “거지도 얻어먹으려면 쪽박을 차야 한다”라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말을 너무 가볍게 듣는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한다. 
그래서 일이 안 풀리는 것이다. 
세상이 험악하고 어려워서가 아니다. 
그건 자기 생각이다. 스스로가 위로하는 것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일이 잘 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다른 사람이 잘될 때 안 되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내 일이 잘 되기를 원하거든 내가 세상에 필요한 사람으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그 뜻대로 필요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면 나를 쓰지 않고는 안 되게 되어있다. 
다시 말하면 꼭 필요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한다면 누구도 나를 쓰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의 사람으로 자리매김하는 모두가 되자. 
그러기에 약게 하려 하지 말고 누군가를 밟고 서려고도 하지 마라. 
자기 대에서 그 대가를 안 치르면 사랑하는 후대를 통해서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신다. 
이런 어리석은 일이 생기지 않게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루어 드리는 일에 쓰임 받는 모두가 되자. 
말의 어투 중에서 “할 예정입니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그 전에 죽어 버리면 끝나는 것이다. 
어떤 사고나 변수가 생기면 필요 없다는 말이다. 
그 말을 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말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사자가 그날부터 조심해야 한다. 
어떤 일이 생겨서 그 일이 도로 묵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기에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정비하고 무엇 때문에 이 일을 있게 했는지 돌아보는 것이 지혜롭다. 
그 일이 성공리에 끝나고, 그 일을 통해서 자기 삶의 지표를 바르게 찾으려면 그 사실의 근원지를 바르게 돌아봐야 길이 열린다. 
잘되기를 바라기보다 잘될 짓을 하자. 잘되기를 바라면서도 잘될 짓을 안 한다. 
잘되기를 바라면서 망할 짓을 하는 바람에 망하는 것이다. 
이왕이면 사는 날 동안 내가 바라는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게 잘될 짓을 하자.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우리의 삶을 드리는 모두가 되게 힘을 합치자.
(2010.09.26.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