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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90.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등록일 : 2026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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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6:19~24)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라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사람들을 가르쳐 말 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행6:1~15)


무엇 때문에 일주일의 한 날을 택해서 이날을 통해 우리에게 예배드리게 하셨는지 그 사실을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 생명과 삶을 허락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우주 만물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날을 정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우주 만물을 허락하셨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삶을 허락하신 그 일에 감사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 위해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시고 터전을 마련해서 세상에 보내신 이 사실을 축소해서 인간세계로 돌린다면, 우리가 세상에 있기까지 우리의 부모가 그들의 모든 삶을 우리를 위해 희생했기에 우리가 부모를 공양함이 당연하다. 
믿는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공양한다.’라고 한다면 근본적인 이 사실에서 자신을 가누고 가꾸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참 믿는 사람의 첫 일보다. 

자기가 누구인 것을 바로 알지 못하면 그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를 끼치게 된다. 
우리가 짬을 모르는 아이일 때는 흙장난을 하다가 엄마가 부르면 흙장난하던 손 그대로 엄마에게 달려와 안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자신을 가누고 생각할 수 있게 자랐다면 더러운 손 그대로 엄마를 안으면 옷을 버린다는 것을 안다. 
어릴 때는 그럴 수 있지만 자란 사람이라면 행동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꾸만 하나님께 달라고 한다. 
결국은 믿음의 상태가 바른길로 가지 못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고 삶의 가치가 자라면 우리의 삶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은 대부분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믿는다’라고 하고 ‘공경한다’라고 한다. 
어릴 때는 그럴 수 있다지만 자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이가 들고 짬을 알면 그때부터는 그 가치관을 바르게 드러내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야 한다. 
믿음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 공경할 수 있는 위치로 옮겨가야 하는데 옮겨가지 못한다. 
어려서 모를 때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듬으시는 그 사랑에 감사해서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안는 것까지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깨달으면 달라져야 한다. 

찬송은 왜 할까? 감사해서 드리는 것이 찬송이다. 
그래서 최고의 제사를 ‘찬송의 제사’라고 한다. 
나를 도우시고, 나를 일으키시고, 나와 함께 하신 그 사실에 감사해서 드리는 것이 찬송이다. 
그럴 것 같으면 우리의 생각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사람들이 바라봐야 할 곳은 보지 않고 해야 할 행동은 하지 않는다. 
내 주위를 도우면 될 텐데 내 주위를 보고 항상 시샘한다. 
시샘하기에 그 사람보다는 더 나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믿음의 삶이란 것은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 아니다. 초보에서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자라면 섬기는 자리로 가는 것이 참 믿는 사람의 할 일이다. 
짬을 모를 때, 사랑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그럴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자란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 
오래 믿은 것을 자랑하지 말고,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옮겨진 것을 자랑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신앙에 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내 삶에서 진정 감사할 수 있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길로 들어설 수 있는 내가 되게 하소서”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 개인의 조건을 먼저 앞세워버리면 문제가 생긴다. 안 되면 섭섭해진다. 
그렇게 되면 믿는 사람의 모임이 아니라 거지 떼를 모아 놓은 것이 된다.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고, 조금만 마음이 삐뚤어지면 그만 돌아서 버린다. 
그건 믿는 것이 아니다. 거지 떼와 똑같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이 사실을 분명히 안 사람이 드려야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냥 찬송을 부르고 기도했다고 예배가 아니다. 
예배란 내 마음 자체가 이 일에 감사함으로 화답할 때 그게 예배가 되는 것이다. 
동냥하는 것은 예배가 아니다. 
어릴 때는 그럴 수 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봐준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알 만큼 아는 사람이 그렇게 한다는 것은 거지 떼와 다를 바가 없다.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기도는 능력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능력의 기도’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내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시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을 통해, 그 사람의 기도를 통해 나타나야 정석이다. 
그렇게 해 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설령 그렇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다시 원래대로 거지 신세가 되었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한 번 믿음의 사람으로서 자리매김했으면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참 믿는 사람으로 자라가야 한다. 
아직은 그 자리에 못 갔다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거기까지 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우리가 전하기 위해 나간다. 
그것도 좋지만, 이 일의 배후에서 믿음으로써 지켜주고, 기도로써 따라 붙이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누가 우리를 위해서 기도했으면 좋겠다.”라고 서로가 상의해서, 밖에 나가서 전하는 사람이 지치지 않고 감사함으로 그 일을 할 수 있게 기도에 전심전력할 수 있는 사람을 두세 사람이라도 세우는 것도 아름답다. 
이 일이 우선되고 나서, 나가서 전하게 되면 믿음의 확신을 갖고 증거를 보게 된다.

아침에 눈을 떠서 나를 일깨우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간다면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모든 조건이 하나씩 나타나고, 일이 안 풀리는 조건이라 할지라도 감사하는 모습을 스스로가 보게 되고, 하게 된다. 
나의 하루를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삶을 허락하신 그 사실을 본인 스스로가 믿지 못하면 믿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아직 내가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은 내가 아직 깨달아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내가 버려야 될 일이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갖추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뜻대로 바르게 쓰임 받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갈 수 있게 나 자신을 점검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은 모두가 되자. 
자기 자신을 철저히 점검할 때 어둠의 세력과 사탄의 세력이 우리를 넘보지 못한다. 
내 주위 형제들이 감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믿는 사람, 참 앞선 사람의 할 일이다. 
그렇지 않고 내 믿음의 삶을 추구하기 위해 주위를 훼파시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내가 발판이 되어서 내 주위 사람들이 믿음의 삶을 이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참 믿는 사람의 할 일이다. 

(행6:1~15) 스데반은 스스로가 그 일을 마다하지 않고 자기 입술에 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 
결국 그들이 스데반을 모함해서 죽게 했다. 
내 주위를 돌아보고 그 일을 가꾸지 못하고 그 일에 대해 시샘한다면 결국은 우리의 믿음 자체가 귀신에게 가지, 하나님께 갈 수가 없다. 
나로 인해서 내 주위 일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갈 때만 천사들이 그 일에 간섭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 일을 감사함으로 가꾸지 못하면 그 일은 천사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사탄에게 가고 만다. 
그러기에 믿음의 기도, 믿음의 발걸음, 믿음의 말 자체가 하나님의 기뻐하심으로 갈 수 있게 돕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내 입술의 말과 내 눈길 하나에도 사탄이 그 일을 돌아보고 있는데 자칫 잘못해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내가 이루어가지 못하면 그 일은 결국 사탄에게 농락당하는 어리석음을 만들어낸다. 
이런 어리석은 일이 생기지 않게 서로를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두가 되자. 

이 사실을 알고 예배에 임하면 예배가 더 아름답다. 
지난 일은 다 덮고 이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에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삶으로 자리매김하자. 
지금, 이 순간부터는 내 주위 일들에 대해 “전에는 그랬잖아. 옛날에는 그랬잖아.” 이런 말을 두 번 다시 하지 말자. 
이 순간부터 나로 인해 내 주위 형제가 믿음의 삶을 쌓아갈 수 있게 돕는 일에 쓰임 받는 내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에 간섭하셔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꼭 나타내실 것이다. 

(마6:19~24) 아픈 사람이 있으면 그 가정 전체에 누를 끼친다. 
아픈 사람 한 사람 때문에 가족이 모두 죽을 먹거나 싱겁게 먹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을 계속하게 되면 주위에서 “왜 우리가 피해를 봐야 하느냐?”라고 불평한다. 
예배도 똑같다. 한두 사람에게 맞추어서 그 사람의 자람을 기다렸다가 그의 자람에 맞추면 전체에 누가 된다. 
그렇다고 앞선 사람에게 맞추면 따라오는 사람들이 힘들어서 덫에 걸리기도 한다. 
예배는 우리 스스로가 이해하고, 스스로가 그 일에 합당한 믿음의 삶으로 따라 붙이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오래 믿었다고 자부하고, 잘 믿었다고 자부하지 말고, 융화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에 합세하는 사람으로 자라가자. 

(마6:19~24) 하나님께서 주신 이 물질은 많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다. 
물질이 많으면 많은 만큼 이 사실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오히려 덫이 된다. 
물질을 통해서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의 앞길을 막기도 하고, 정신 상태를 흐리게 만들기도 한다. 
물질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조건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일에, 전하는 일에 쓰임 받으라고 준 것이다. 
바르게 쓰임 받고 싶으면 내 주위를 이해하고 내 주위를 바르게 융화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줘야 한다. 
자기의 독단적인 조건을 내세우면 결국은 자기만 손해를 본다. 
돈이 많다고 자랑해 봐야 우리의 생활 자체가 쓰임 받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내게 주어진 모든 조건, 나로 인해 주어질 모든 조건이 내 주위 형제들에게 감사와 기쁨이 되는 일에 쓰임 받는 우리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셔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입각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도우실 것이다. 
이런 아름다움을 바르게 안착시키는 모두가 되자.

(2010.10.17.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