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3:13~18)
기본적인 사람의 자세를 잠시 돌아보자. 
어떠한 이유이든 올바른 삶에는 이유가 없다. 
진정 올바른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진정 부모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행동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배는 보석된 나 자신을 들고 하나님께로 가는 시간이다. 
보석된 자신을 들고 하나님께로 가면서 사람을 의식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가치가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석처럼 여기셔서 나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안다면 자신을 보석처럼 여기지 못하는 것은 짐승보다 못한 것이다. 
그래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관을 떨어뜨려 놓고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사람을 의식한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큰 죄가 되는 것이다. 
성경에는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마23:9)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자칫 오해하면 기독인들은 불효막심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천만에다. 
참삶의 가치관, 참사람의 가치관을 우리에게 인식시키고자 주신 말씀인데, 사람들은 이 말을 오해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드러내시고자 너에게 맡긴 임무, 그 임무를 맡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있을 자리에 네가 있는 것이 아니라 너를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부모 된 너의 할 일이 아니냐는 말이다. 
이 땅에서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체가 ‘죄’인 것이다.
진짜 부모라면 부모의 위치를 통해 자녀들이 창조주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부모의 할 일이라는 말이다.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고 영생하기를 원한다면 부모의 위치를 통해 창조주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부모의 할 일이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부모가 되어서 자식에게 효도하라고 하는 것, 효도를 바라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부모가 희생함을 통해서 자식이 창조주를 바라보고, 사람의 근본 된 사실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진짜 부모의 할 일이다.
그래야 자식에게 온전한 것을 주는 부모가 되는 것이다. 
만약 내게 생명을 준 이가 내 부모라면 내가 죽지 않아야 하고, 나를 위해서라도 부모가 죽지 않아야 한다. 
정말 자식을 위한다면 자식이 울지 않도록 부모가 죽지 않아야 한다. 
부모가 죽기에 나도 죽는 것이다. 부모가 안 죽으면 나도 안 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 엡6:2, 마15:4)라고 했을까? 
부모로서 자기 몸으로 태어난 자식들에게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에 쓰임 받는 위치에 서주길 바라신 것이다. 
자신의 모든 생애를 들여서 자식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부모의 할 일이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며까지 말씀을 전하신 것이다. 
이 사실을 바르게 깨닫게 될 때, 이 사실의 참 가치관을 알게 될 때 그 어떠한 것도 우리 앞을 가로막지 못한다. 
그러기에 참 부모라면 “내가 네게 어떻게 했는데?” 이런 말을 하기보다 “내가 네게 전한 것이 혹여나 창조주를 바라보는 일에 덫이 되지는 않았니?”를 물어볼 수 있는 것이 진정 올바른 부모이다.
“나는 자식이 없다”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자신을 닮고 싶어 하고, 본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을까?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참삶의 가치관을 보여줄 수 있는 위치에 서야 한다. 
나의 삶을 통해 그들이 참삶의 가치관을 찾아가게 만드는 것이 할 일이다. 
만일 교사라면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나로 인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참 교사의 할 일인 것이다. 
이 사실을 바로 이수하지 못한다면 끝내는 그 책임을 본인에게 물으신다. 
자기 자신과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내 이웃도 나로 인해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내 할 일이다. 
생긴 모습이 서로 다르고 부모가 달라도 인류의 근본으로 올라간다면 그 꼭대기에는 아담과 하와가 있다. 
‘나’라는 존재를 통해서 참삶의 가치관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본인에게 묻는다. 
내 삶이 마침표를 찍게 될 때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있어서, 당신이 앞장을 서서 내가 진정 참삶의 가치관을 찾게 되어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듣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 
내가 잘 먹고 잘살았다가 문제가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나를 통해 참삶의 가치관을 찾게 됨에 감사하다는 말을 듣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사람으로서는 가치가 없다. 
사람으로서 이 땅에 와서 나를 통해 후대가 주어지고, 내 몸으로는 자식을 낳지 않았더라도 내 삶을 통해 후대가 생겼다면 그들이 나로 인해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참삶의 가치관을 찾게 만드는 것이 선대 된 사람의 할 일이다. 
그렇지 못하면 사람으로서 가치가 없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에 자신을 온전히 드릴 수 있는 모두가 되자. 
‘나’라는 사람의 삶의 가치관을 통해 내 후대들이 사람의 근본 된 사실을 깨달아서 먼 훗날 “당신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당신이 있어서 현재의 삶을 이루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참 믿는 사람의 할 일이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나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또 나와 상관없는 사람에게도 ‘나’라는 사람을 통해 그들이 참삶의 가치관, 참 생명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일에 바르게 쓰임 받는 모두가 되자. 
이 사실을 바르게 이수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모으신 뜻대로 우리의 삶의 조건을 책임지고 이끌어 가실 것이다. 
(요일3:13~18)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허락하신 것이다. 
내 삶의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 조건대로 하는 바람에 결국은 스스로가 자멸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나를 위해서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신 것이다.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온전히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우리가 어렵거든 “내가 버릴 게 있구나. 아직 나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내 자아를 버리지 못했기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내게 버릴 것은 버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구나!” 다시 말하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역사하신다. 
하나님께서 ‘나’라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고 이끄시기 위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심을 인식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내가 버려야 될 것이 있음을 아시고 “내가 버리겠나이다.”라고 말만 하면 그 순간으로 나를 끌어올리신다. 
나를 지켜보시는 분이 계신 것을 의식하기에 우리가 믿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살겠나이다.”하고 내 삶의 방향을 스스로가 인식하고 그 사실에 나를 내어놓으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신다. 
이 사실을 내가 붙들고, 내가 해결하려기에 어려워야 정석이고 일이 안 풀려야 정석인 것이다. 
우리가 어렵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내시기 위해, 나를 이끌어내시기 위해 주신 사랑의 조건이다. 
그러기에 그 일에 불평 불만하기보다 나를 정화시키기 위한 사랑의 방편이기에 감사함으로 그 일을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나를 도와주시옵소서.”라고 입을 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간다면 하나님께서 꼭 역사하신다. 
이런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연유대로 쓰임 받는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알리는 일에 쓰임 받는 내 입술과 생활이 되게 최선을 다하자. 
마음에는 믿기지 않아도, 마음에는 내키지 않아도 실증의 삶을 산 사람이 증언한다면 믿는 흉내라도 내는 여러분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그 사실을 책임지고 이끌어 가실 것이다. 
“비록 우리의 삶이 괴롭고 답답할지라도 이와 같은 조건을 통해 우리를 이끌어 내시고자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귀한 사실을 통해 해야 될 일을 돌아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사는 날 동안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리는 일에 쓰임 받는 우리의 입술과 생활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0.11.07.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