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1~5)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
가정에서 가족을 사랑하는 가장은 자기의 모든 조건을 다 들여서 가족의 먹을 것, 입을 것, 살아갈 공간을 준비하고 그 가운데 자라오는 후대를 위해 예비하고 자리를 굳혀간다. 
자녀들이 화목한 가운데 자기에게 주어진 영역과 조건 안에서 감사하고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일 때 어른들이 기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세상을 통해서 우리가 해야 할 바, 사람 된 근본을 찾아가게 하시기 위해 오늘도 우리에게 하루를 허락하셨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조건을 기쁘게 받아 감사하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을 믿는다. 신앙생활을 한다.’라는 근본 된 사실은 신앙생활을 통해서 사람 된 근본을 찾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네가 돈을 벌어서 뭘 할래? 공부해서 뭘 할래? 일해서 뭘 할래?”라고 물었을 때 뚜렷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갈 때 우리의 믿음도 그에 준해서 자라가게 된다. 
우리가 주일 날 모여서 찬송하고 성경을 본다. 
뭘 하려고 그렇게 할까?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가야 될 그 길을 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써 준비하는 과정이다. 
예배드림의 주목적은 먼 훗날 우리가 가야 될 곳을 바르게 이해하고,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그곳에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그러기에 우리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먼 훗날 천국에 간다. 
“천국에 가서 뭘 할 건데?”라고 물었을 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후대들을 교육할 때 초등학생은 초등학생대로, 중학생은 중학생대로 나이대별로 교육하는 것은 그 수준에 맞게 삶을 키워가기 위한 것이다. 
그 아이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게 그 아이들의 차림새에 맞추고 수준에 맞춰서 옷을 입혀 학교에 보낸다. 
다시 말하면 먼 훗날 우리에게 주어질 그 사실에 대비하는 준비 과정이다. 
이 준비 과정을 이해한다면 예배를 드림도, 실제 생활에서도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가게 된다. 
갑부들이 이 사실의 진부를 바르게 알고, 자기의 위치관을 바르게 알면 그렇게 허송세월하거나 스스로 갇혀있는 그런 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다. 
어른들에게 지금 흙장난하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면 손을 들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지금 흙장난하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면 얼른 손을 든다. 
왜냐하면 아이는 더럽거나 옷을 버리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엄마가 빨면 되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성인이 되었기에 ‘이 나이에는 흙장난을 해서는 안 돼’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서 내가 현재 서 있는 위치관을 바르게 알아서 내 삶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간파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먼 훗날 내게 다가올 사실, 내게 다가올 세계를 이해하고 그 사실에 바르게 도입할 수 있게 준비하는 과정이다. 
‘내 삶을 바르게 이해하고 내게 주어질 먼 훗날의 일, 그 조건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나 자신이 되게 하소서’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통해 배우고 그 일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하는 과정이 예배드리는 과정이다. 
“죽고 난 뒤의 일에 대해 확신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만일 그 사실이 없다면 이 일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바보 중의 바보가 된다. 
먼 훗날의 미래가 없을 것을 뻔히 알면서 그런 삶을 살지는 않는다. 
나 자신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먼 미래에 나 자신이 있을 곳을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그 삶을 사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내가 수고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먼 훗날 내가 받을 보상이 없을 것 같으면 현재의 삶에서 이렇게 살 필요가 없다. 
무슨 짓을 하든지 현재의 삶에만 충실할 것이다. 
그러기에 먼 훗날 내게 주어질 조건을 대비하기 위해 예배를 드리고 준비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과 생활 자체를 전반적으로 다 바꾸어서 하나씩 그 일에 입각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조건은 딱 한정되어 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먹는 것, 입는 것, 모든 것이 다 한정되어 있다. 
우리가 바로 알고 나면 세상은 참 아름다운 세상이다. 
문제는 서로가 자기 것을 챙기려고, 자기 것을 준비하느라고 그런 것이다. 
그것 때문에 생명을 걸기도 하고 생명을 죽이기도 한다. 
그러기에 내면의 속사람을 키워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자. 
사람 속에는 생명이 있다. 생명이 있을 때 사람이지 생명이 떠나버리면 시체가 된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내가 뭘 하려고 돈을 버는지 돈을 버는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내가 물질을 얻고 싶으면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물질을 바라는 조건만 분명하면 물질을 주신다. 
“그런데 내가 물질을 달라고 하는데 왜 안 주실까요?” 이유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을 주면 오히려 자신을 망칠 것을 뻔히 알기에 주시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물질을 바라든지, 어떤 조건을 바라든지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도우신다. 
그냥 “물질을 주세요. 뭘 하고 싶어요.” 이런 바램보다도 이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이 일에 간섭하여 주셔서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루어 드릴 수 있게, 나 자신을 찾기 위해 하고자 하오니 이 일을 도와주세요.”라고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시고 도우신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다면 이 산 더러 저 산으로 옮겨지라고 하면 옮겨질 것”이라고 하셨다. 
다시 말하면 네 속에 내재 된 생명체, 그 가치관을 네가 파악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너 자신도 파악하지 못하면서 네가 뭘 하려고 하느냐는 말이다. 
자기 자신도 파악하지 못하면서 “주어진 세상에서 이렇게 살고자 원한다.”라는 것은 망언이다. 
구하는 이유, 자기가 바라는 조건의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창1:1~5) 사람이 이 땅에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준비한 과정이다. 
내가 뭘 하고자 한다면 무엇 때문에 하는 걸까? 
후대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후대’라는 말 속에는 자기 속으로 낳은 자식이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보듬고자 하는 사람은 후대를 둔 사람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돕고자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조건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내가 그를 돕기 위해 물질이 있어야 하고 조건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서, 사람에게 주시기 위해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내가 현재 삶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은 그 조건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먼저 예비하신 것이다. 
예비하신 과정이 이 말씀(창1:1~5)이다. 
먼 훗날 사람이 이 땅 위에 살 것을 먼저 아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서 준비하는 과정이 창세기에 계속해서 나온다. 
다시 말하면 내가 돈을 벌고자 한다. 어떤 일에 성공하고자 한다면 이 일은 먼 후대를 위해 내가 준비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내 현재의 삶이 영원하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오래 살고 싶으면 집안사람이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서 저 사람은 꼭 오래 살아야 해”라는 말과 기도가 나와야 한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들으신다. 
나로 인해 그들이 자기의 삶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왜 모세가 오래 살았을까? 
모세가 없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사람이 없기에, 모세가 죽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무효가 될 것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오래 살게 하시고 그의 삶을 억지로라도 끌고 오신 것이다. 
필요한 위치에 서서 하나님께 필요한 조건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내 삶을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내 삶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고 나와 함께하심을 꼭 드러내실 것이다. 
(요3:16) 이 말씀은 믿음의 삶에 도입한 사람은 누구나 잘 아는 말씀이다. 
사람을 교도소에 감금하는 것도 그 사람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비록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그 사람을 깨닫게 해서 재기의 길을 주기 위함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쳤다는 것은 어려움을 통해 나를 깨닫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편이다. 
내게 착오가 생기고 어려움이 생겼다면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려고 허우적대지 말고, ‘무엇 때문에 어려움이 왔을까?’ 어려움을 허락하신 이유를 돌아보는 지혜가 주어지면 그 순간으로 어려움에서 빠져나오는 조건을 허락하신다. 
문제는 감금시키는 이유를 스스로가 인식하지 않기에 어려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착오나 어려움 자체는 내가 그 일을 인정하지 않기에 못 빠져나오는 것이다. 
‘참회’라는 말은 내가 그 일을 인정할 때 참회가 되는 것이다. 
“과연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깨닫지 못했구나” 이 말이 내 마음에 와닿아야 거기서 빠져나온다. 
그 사실을 내 마음에 인식하지 못하면 설령 형을 마치더라도 그 사람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과 똑같다. 
“내가 형을 마쳤는데 왜 안 풀릴까?” 당연하다. 그 사실을 본인이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누구를 위해서? 먼저는 나를 위해서, 다음은 온 세상을 위해서다.
나를 위해서가 먼저 되어야 한다. 다음은 내 가족을 위해서, 다음은 내 친족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다. 
자기 자신부터 깨닫지 못하면서 “내 주위를 위해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다. 
믿는 나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시고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지, 그 사실이 나를 위해 주심을 깨닫는다면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꼭 드러내실 것이다. 
이 일에 바르게 쓰임 받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쓰임 받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능력과 조건을 허락하신다. 
“나를 쓰시옵소서” 할 때 우리와 함께하셔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우리와 함께하심을 사는 날 동안 꼭 드러내실 것이다. 
(2010.11.14.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