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14:1~7)
지혜로운 사람은 하루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자기 할 일에 대해 준비한다. 
학교에 가는 아이가 준비도 없이 허둥지둥 책가방을 챙기고, 자신의 일과에 대해 감지하지 못해 끝내는 부모의 도움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언뜻 보면 별것 아닌 것 같고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사실이 어느 시기까지 기한이 있는 것이다. 
그 기한 안에 이 사실을 마치고 자기의 삶에 도입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나이가 들어서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게 된다. 
신앙생활도 똑같다. 
처음 교회에 발걸음을 옮긴 사람이 있다면 먼저 친숙한 사람이나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예배의 앞자리에 앉는 것이 아름답다. 
뒷자리는 처음 온 사람이 앉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지켜보고 “내가 도울 일이 없는지,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도움을 줄까?”라고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 뒤에 앉는 것이다. 
말하자면 교회의 중직자들이 앉아야 정석이다. 
신앙의 연륜도 있고 모든 사실을 갖춘 사람이 뒷자리에 앉아 인사도 나누고 배려할 때 처음 교회에 발걸음을 옮긴 사람이 마음을 열게 되고, 우리를 한 자리에 불러 모으신 배후의 조건에 마음을 열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교회뿐 아니라 어느 곳, 어느 모임에 가더라도 뒷자리에 앉아서 객관적으로 있게 되면 전체도 손해지만 개인도 손해다. 
뒷자리에 앉으면 전체를 지켜보기에 나름대로 신앙의 연륜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일을 아름답게 지켜볼 수 있지만 신앙의 연륜이 없는 사람은 지켜보고는 자기 나름대로 판단을 짓기에 자신을 가누어야 할 사실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뒷자리는 가능하면 신앙의 연륜이 있는 사람들이 ‘이곳은 내가 지키리라’하는 다짐에서 뒷자리에 앉으면 아름답다. 
우리가 일주일에 하루를 택해서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언뜻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자기 일생의 삶을 스스로가 판가름 짓는 것이다. 
“내 팔자는 이런 팔자다.”라는 것을 자신이 스스로 시인해 버리기에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번 거기서 맴돌게 된다. 
그러기에 꼭 교회가 아니라도 어느 모임을 가더라도 뒷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 좋다. 
뒷자리는 모든 사실을 다 파악하고 그곳을 보듬고자 하는 사람이 앉는 것이다. 
처음 온 사람이 뒷자리에 앉게 만들면 안 된다. 
내가 신앙의 연륜이 있다고 하기보다 연륜이 있거든 뒷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그 사실을 보듬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인정하시고 갈 길을 이끌어 가신다.
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처음 온 사람이 있다면 ‘저 사람이 이런 사람이 될 수 있게 내가 도와야겠다’라는 뜻에서 내가 있는 자리와 움직이는 거동, 입술에 뱉어내는 말 한마디까지도 스스로가 감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예배드리는 것으로 그치면 여러분의 모든 조건은 다 스톱이다. 
그냥 어영부영 넘어가는 것이지 실제 생활에서는 스톱이다. 
“내게 왜 이런 어려움과 이런 조건이 닥쳤나?” 그 일은 본인이 부른 것이지 누가 준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보듬고자 해서, 지키고자 해서 뒷자리에 앉는 것은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뒷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 
하게 되면 스스로 자르는 것이 되고 어느 시기가 지나면 삶의 마침표를 찍게 된다. 
잘 되고 싶거든 아무것도 몰라도 앞자리에 앉아라. 
누가 앞에 서더라도, 설령 아무나 나와서 성경만 쭉 읽어도 그 사람은 자리매김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내가 교회에 온 목적을 망각해 버리면, 교회뿐 아니라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 자체를 망각해 버리면 그 사람의 모든 조건은 올스톱된다. 
그때부터는 떠내려가든지 조건이 없으면 어느 시기가 지나면 그 사람은 떠나게 된다. 
누구든지 잘 되고 싶거든 잘 되는 사람 옆에 앉아라. 
언뜻 보면 이런 사실이 별것 아닌 것 같다. 
예를 들면 파리가 날아다니다가 앉았다. 그러면 파리채를 들고 파리를 잡는다. 
만일 파리가 귀한 그릇에 앉았다면 그 물건에 손상이 갈까 봐 파리를 잡지 않는다. 
파리를 잡는 것보다 그 그릇이 더 귀하기에 파리를 놔둔다. 
내가 귀하게 쓰임 받고, 귀하게 여김을 받고 싶거든 귀한 자리에 앉고 귀한 사람과 어울려라. 
그 조건 때문에 스스로가 보호받아 자랄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된다. 
불평이 많은 사람 옆에 앉으면 불평이 많아지게 된다. 
세상 조건에 빗나간 사람 옆에 앉으면 그도 똑같은 자리에 놓이게 된다. 
어느 시기가 지나면 같은 흉내를 내기에 같은 조건이 그에게도 주어지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어디에 앉느냐? 파리가 있는 자리에 앉는다. 
잘 되고 싶거든 잘 되는 자리에 가서 앉으면 불운이 다가오지 못한다. 그 자리를 뜰 때 불운이 닥친다. 
세상의 이치로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스스로가 파리채로 맞는 자리에 자초해서 앉는다. 
내가 보호받기 위해서는 일단은 보호받는 앞자리에 앉든지 잘 되는 사람 옆에 앉는 것이 정석이다. 
잘 되려고 하지 않아도, 특별한 능력을 받으려고 하지 않아도 “나로 인해 내 주위 형제가 사랑을 깨닫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게 하소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하소서.” 그 일념 하에서 자기의 삶을 추구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이런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가능하면 정상적인 사람 옆에 앉아 자기의 삶을 추구해라. 
신앙생활을 한다면 창조주를 진정으로 바라보는 사람 옆에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마련이다. 
아무 말을 안 해도 앉아서 그냥 찬송만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차츰 깨닫게 되고 그 길로 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 마음 자체가 그곳에 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신기하게 일이 안 풀리는 사람은 일이 안 풀리는 사람 옆에 가서 같은 영향을 입고 같은 조건을 만든다. 
만일 물에 들어간다면 능력이 되는 사람은 물에 들어가기 전에 적응할 수 있는 조건을 준비해서 들어간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내가 어느 위치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하고 나 자신의 조건을 알고 행동하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가자. 
“저 사람이 잘 믿는다고 하니, 저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니 나도 옆에 있으면 잘 될까?” 분명히 잘 된다. 
옛말에 “없는 허풍쟁이보다 있는 구두쇠가 낫다”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있는 사람은 아낀다고 해도 옆의 사람이 안 된 것을 보면 그냥 있지 못하지만, 없는 사람은 아무리 주려고 해도 말뿐이지 나오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사는 날 동안 우리에게 조건을 허락하시고 우리를 불러 모으셔서 좋은 것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까지 사랑을 보이신 하나님께서 다가오실 때 나 스스로가 먼저 맡기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사실을 책임지시고 이끌어 가신다. 
문제는 내가 서야 될 위치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스스로가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봤을 때 가장 잘 믿는 사람, 가장 잘 된 사람 곁에 있으면 그가 나를 도와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어느 시기가 되면 깨닫게 된다. 
그가 열심히 기도할 때 가만히 지켜봐라. 
기도하기 싫으면 억지로 지어서 할 필요 없고 ‘이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믿고 이렇게 할까?’를 가만히 지켜봐라. 
그가 찬송할 때 나는 하기 싫으면 입으로 흉내만 내고 ‘저 사람이 잘 되는 이유가 어디 있나?’를 가만히 살펴봐라. 
때가 되면 그 사람의 조건이 먼지로라도 날아온다. 
잘 되는 사람, 믿음의 사실이 바르게 정립된 사람은 하는 행동 자체가 벌써 다르다. 
처음 온 사람이 잘 되고 싶으면 일단 믿음의 자리가 완전히 되어 있는 사람 옆에 있으면 어느 시기가 지나면 똑같은 모양은 아니더라도, 그 사람보다는 한 단계 낮아도 흉내를 내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를 돕지 않고는 못 배긴다. 왜냐하면 같은 너울을 쓰고 있는데 그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욕을 먹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돕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참믿음의 삶에 도입하고 싶으면 잘 믿는 사람, 잘 되는 사람 옆에 앉아서 지켜봐라. 
찬송하기 싫으면 입만 벌리고 흉내만 내라.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면 우리의 삶이 바뀐다. 
뒷전에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면 지켜본 만큼 자신을 주눅 들게 스스로가 만든다. 
이 자리는 내가 앉을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어느 시기가 지나면 깨닫게 된다. 
언제 깨닫느냐? 망하고 난 뒤에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리매김하게 만드는 것이 예배이다. 
아무리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어도 뜻 없이 부르고, 읽고 나면 차라리 자리매김하는 사람보다 못하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나를 이 자리에 불러 모으셨을까? 무엇 때문에 오라고 하셨을까?”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리매김하자. 
“예배를 통해 내 삶이 변모되게 하옵시고 예배를 통해 나의 갈 길이 보이고, 나의 갈 길이 열리는 아름다운 시간이 되게 하소서”하는 바램으로 입술 벌려 기도하는 각자가 되기를 바란다. 
(요14:1~7) 하나님께서 우리네 사람들이 겪어야 할 모든 사실을 먼저 아시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관상가들이 사람의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의 조건을 인지해 간다. 
문제는 우리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이 세상에 왔을 때 그 사람이 일생에 걸어가야 할 길을 하나님께서 다 예비하시고 보내셨다는 사실이다.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도 형제들의 모습이 다 다르다. 
왜 다르게 만드셨을까? 그 사람만이 겪어야 할 특성을 먼저 배려하셔서 그를 세상에 있게 하신 것이다. 
그 사람만이 걸어야 할 길을 하나님께서 먼저 아시고, 그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을 예비하시고 그를 세상에 보내셨기에 나만이 걸어가야 할 길을 찾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내가 어떤 도움을 얻으면 “이 도움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라고 할 때 길이 열리는 것이 정석이다. 
문제는 그러한 사실을 떠올리지 않고 그 도움을 통해서 내가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하게 되면 그 길은 절대 안 열린다. 
사람이 세상에 올 때 그 사람만이 가야 될 길을 하나님께서 먼저 예비하시고 모습을 지우셔서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문제는 나만이 걸어가야 할 길을 하나님께서 먼저 인지하시고 내 길을 가게 만드셨는데 이 사실을 스스로가 인지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아서 어려움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뜻을 찾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하게 되면 그의 길은 당연히 열린다. 
지혜롭게 사는 방법은 다른 길이 없다. 나만이 걸어야 할 길, 나에게 모습을 지우신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대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길은 열려야 정석이다. 
열리지 않는 것은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길이 열리는 사람은 잘 되고자 그 길을 스스로가 걸어간다. 
안되는 사람은 안 되는 일을 스스로가 자초해서 결국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조건이 어떤 조건인데요?”라고 묻는다면 내가 바른길을 걷고자 마음을 갖고 있으면 설령 누군가 잘못된 길로 나를 끌고 가더라도 내 마음의 중심에 그 사실을 잊지 않으면 끝내는 그 길을 가게 만드신다. 
그러기에 잘 되고 싶으면 빌어먹어도 잘 되는 사람 옆에 있어라. 
사는 날 동안 올바르게 살고 싶으면 믿음이 좋은 사람 옆에서 생활해라. 하게 되면 복을 받는 길로 가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재수가 있어야 정석이다. 잘 되고자 하면 잘되어야 정석이다.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리는 일에 쓰임 받는 내가 되게 도우소서”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지 않고는 못 배기신다. 
잘 되려면 잘 될 짓, 복 받을 짓을 해야 한다. 그래야 내 길을 열린다. 
“나의 생활과 조건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리는 일에 쓰임 받는 내가 되게 하소서” 이렇게 되어야 정석이다. 
부자들은 불평불만을 하지 않는다. 불평불만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망한다. 
부자들은 항상 긍정적인 말을 한다. 
“어쩌면 좋지?”라며 쩔쩔매는 부자들은 없다. “어쩌면 좋지?”라며 쩔쩔매는 부자들은 분명 망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은 “네가 해야 할 일에 맞게 네 모습을 정해서 세상에 보내놓은 다음에는 걱정하지 말아라. 너는 네 맡은 일만 해라. 그리고 필요하거든 내게 요구해라. 요구하면 들어주마.”라는 말씀이다. 
지혜롭게 간구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지키시고 도우시고자 애쓰실 때 우리가 먼저 그 삶에 감사함으로 다가가면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고 역사하신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게 생명이 있다는 것은 내게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서 아직도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게 되어야 한다. 
내가 지금 살아있고, 생명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내 삶에 감사를 더하시기 위해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게 되어야 하는데 안 되어 있으니 매번 입술에서 불평불만이 나온다. 
입술에서 불평불만을 걷지 않고는 절대 복이 다가오지 않는다. 
복 받는 사람은 복 받는 말을 한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실 거야. 그때까지 내 삶의 조건을 흔들지 않을 거야.” 이것이 기본적으로 갖추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절대 약게 굴면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 약게 굴면 한순간은 괜찮을지라도 끝내는 자기의 복을 스스로가 차단하게 된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우리의 삶을 온전히 드리는 모두가 되자. 
(2010.11.21. 주일 / 김영호 목사)